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
대학원에 들어온 지 두 달 밖에 안되었지만, 최근 가장 많이 한 고민은 연구의 목적이었다. 나는 연구를 하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렇기에 대학원을 진학하였는데, 요즘 내가 하는 거라고는 좋은 저널에 투고할 수 있는 논문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수과학과 공학의 차별성이 여기서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순수과학을 하면 세상에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한 원인과 원리를 밝히고 그것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공학을 하면 그 원리를 활용해서 좀 더 효율이 높은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그게 기존의 기술보다 단 1%라도 높다면 된다. 그 ‘1%’가 처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너무 작은 차이 같아 보였고, 세상에 도움이 되나 싶었다.
일주일 정도 한참을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해 지냈는데, 문득 기준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Genius is one percent inspiration and 99 percent perspiration.”
- Thomas Edison
물을 끓이기 위해서는 100도가 되어야 한다. 99도에서 단 1도라도 부족하면 물은 끓지 않는다.
그 1도에 기여하는 일이라면, 해볼 만하다 싶었다.
이번 주는 물리적으로도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수요일에는 워커힐에서 ‘AI와 인간의 공존’이라는 주제로 열린 글로벌인재포럼 2025에 참석했다. 작년부터 참석하였는데, 올해 포럼의 핵심 주제는 '공생지능의 시대'였다. 공생지능이란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의 강점을 살려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AI가 인간을 대체한다'는 불안한 전망 대신, 'AI와 인간이 서로 협력하며 공존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에 샘 리처드 교수님과 특별세션에서 함께 토의하였는데, AI를 제대로 적용하려면 기술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윤리와 기술을 함께 이해하며 정책 취지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전문 인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인간 지능과 AI가 만나는 공생지능 시대에는 통찰력으로 정책을 설계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능력이 중요하며, AI가 할 수 없는 바로 그 부분이 인간 전문가의 핵심 역량이라고 하셨다.
회사에서도 그랬고, 연구실에서도 AI는 이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오히려 교수님들이 Chatgpt나 gemini 등을 사용하기 권장하시고, 논문에도 제목에 ‘AI를 활용한’ 이 포함되거나 AlphaFold 같은 툴을 활용한 데이터를 포함시켜야 이름 있는 저널에 퍼블리시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대체불가능하면서도 공존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게 된 것 같다.
요즘은 나이나 직급에 요구되는 기대치를 어떻게 충족하는 걸까에 대한 생각도 많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어간다. 어디 가서는 자라나는 친구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 자리에 있지만, 정작 나는 나이게 걸맞게 살아가고 있나 싶다. 나의 고민들을 듣고 누군가는 아직 너무 세상을 모르고 때가 덜 묻어서 그렇다고 하기도 한다.
10년 전 중학생 때 내가 적은 글을 읽어보아도, 지금과 생각하는 것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때의 걱정은 지금과 다른 주제이지만 여전히 나는 삶에 다양한 걱정을 하며 살아가고, 뚜렷한 답변을 내릴 만큼 식견이 넓지 못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때의 걱정은 해결되었으니, 지금의 걱정도 분명 뒤돌아보면 해결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또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목요일엔 전 회사 분들과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팀장님과 수석님 세분이서 보기로 했는데, 또 다른 책임님과 후배사원과 보기로 한 술자리가 예정되어 있어 두 개의 약속이 한 자리로 합쳐졌다. 그냥 회사 회식 아니냐는 나의 투정에 팀장님은 “미지 팬미팅?”이라고 하셨다.
퇴사하고 회사분들은 이렇게 제대로 만난 건 거의 처음이다. 사실 조금 떨렸다. 매일 같은 팀에서 보던 사람들과의 2달은 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보니 괜히 말도 잘 안 나왔다. 소개팅을 하는 기분이었다. 팀장님께서는 팬미팅 명색에 맞게 선물도 준비해 오셨다. 미리 생일 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셨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너무 감동이지만 두 개 모두 각각의 손편지까지 적어주셨다. 내 첫 팬레터인 만큼 평생 간직해야지. 팀장님은 팬클럽 이름도 지어오셨는데, ‘미지수’라고 하셨다. 다른 분들은 팬클럽회장에 의해 강제 가입되셨다.
예전에 팀장님이 읽으시는 책을 보고 나도 따라 읽은 적이 있다. 캐서린 메이의 <우리의 인생이 겨울을 지날 때>이다. 겨울마다 한 챕터씩 읽으신다고 하셨다. 윈터링, 식물과 동물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미리 채비를 한다. 우리 인생에 겨울이 찾아왔을 때 이겨내는 법, 겨울은 언제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최근 내가 했던 고민들은 날씨가 부쩍 추워짐과 동시에 인생에 겨울이 찾아오려고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몇 번의 겨울을 나봤기에 이번 겨울은 비교적 빨리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 후 이상과 현실의 차이로 잠시 휴학을 해야 하나까지 생각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휴학하면 하지 뭐!’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슴 한편에 품은 사직서는 사실 앞으로를 살아갈 힘이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 그럴 사람들이 곁에 몇 있다는 것, 과거의 내가 그때의 역경을 이겨내 현재에 산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지금을 의미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