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결을 알아본다는 것

나락도 락이다

by 미지
연구실 출근길

개인적인 사정과 별다르지 않은 일상에 연재가 늦어졌다. 이번 주는 특별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내 생일이었다. 대전이라는 곳에 있는 까닭에 생일 당일인 수요일에 만나지 못하는 인연이 많아 주말부터 1주일을 꼬박 생일 주간으로 축하를 받았다.


연말 시상식을 봐도 감사한 사람들을 쭉 나열하고 자신의 소감을 말하곤 한다. 왜 그러나 했는데 나도 이 입장이 되니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우선은 감사한 일들을 먼저 나열하고 마지막에 내 소감을 적도록 하겠다. (소감만 볼 사람은 건너뛰어도 좋다.)


가장 먼저는 가족과 함께한 생일파티이다. 이번 생일에는 축하 자리가 많을 것 같아, 매번 케이크를 먹기보다는 어떤 음식이든 초를 꽂고 케이크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락도 락이다’라는 말이 있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파운드 “케이크”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친구로 지낸, 이제는 15년째 알고 지낸 친구가 있다. 친구가 일본에서 회사를 다니기 때문에 1년에 1-2번 볼까 말까 하고 각자 사는 게 바빠 연락도 자주 못하지만, 언제 봐도 어제 본 것처럼 편하고 내 어떤 모습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을 친구이다. 마침 이번주말에 사촌언니 결혼식때문에 한국에 온다고 해서 미리 생일 식사를 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일본에서 생일선물까지 사다 줬다.

감자전 (코리안 팬“케이크”)

이번 주말에 과제와 연구실 공부로 할 게 많아 친척들과의 식사 자리를 거절했었는데, 사촌언니가 한밤중 남긴 “미지 생일선물 샀는데, 언제 볼 수 있어?”라는 문자 하나에 바로 엄마에게 밥 먹으러 가겠다고 했다. 다들 바쁜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나의 생일을 챙겨주겠다고 미리 준비해 주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베이글 케이크

카이스트에서 알게 된 05년생 후배들이 참 많은데, 그중 유독 나와 비슷한 공감대를 가지고 잘 따르는 친구들이 있다. 4살 차이면 꽤 큰데, 어른 공경은 안 해준다. 고맙게도 또 생일까지 챙겨준다고 해서 월요일에 퇴근 후 저녁식사를 했다.

가지 라자냐 케이크와 식사 후 베라에서 아이스크림 케이크

이 날은 계획에 없던 일들이 좀 많이 생겼는데, 밤 9시 40분쯤 기숙사에 들어가서 잘까 하다가 나름 생일인데 무언가 하고 싶어서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10분 뒤 영화 시작인 나우유씨미 3을 보러 신세계 백화점으로 택시를 타고 뛰어가서 보고 왔다.

대전의 심야영화는 21:55

끝나고 나오니 동네가 조용하고 깜깜했다. 그때 올려다본 오노마호텔. 뭔가 엄청난 일탈을 한 것만 같은 기분에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생일 당일 자정

생일 자정에 (정말 너무 감사하게도) 나한테 제일 먼저 생일축하를 하겠다고 대기 타고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평소 같으면 이미 잘 시간이지만 답장을 해주기 위해 안 자고 기다렸다. 미리 받은 편지와 새벽에 온 연락들을 읽으며 행복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연세대학교 총동문회

살면서 처음으로 꽃바구니도 받아봤다. 연세대 최고.

프랑스에서 온 선물

카이스트 대학원에서 친해진 프랑스 친구가 생일을 챙겨줬다. 프랑스에서 크리스마스에 먹는 초콜릿과 본인이 좋아하는 과자라고 했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고마웠다.

생일 당일 저녁

사실 가장 감사했던 것은 생일 당일 저녁에 집에 초대해 주신 전 직장 책임님이다. 퇴근하고 와서, 그것도 평일에 누군가를 집에 초대해서 요리해 주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정말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생일에 가족 없이 혼자 타지에서 미역국도 못 먹을 것 같다며 놀러 오라고 하셨다. 사실 나보다 더 생일에 진심이신 것 같기도 했다. 이 감사한 마음을 앞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 아빠, 전 연구실에서 잘 지내요

초를 안 불어본 음식이 없는 것 같다. 연구실에서는 수업 때문에 나가서 밥 먹을 시간이 없어 던킨도너스에서 사 온 크로크무슈에 초를 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어묵 (fishcake)에 초를 불지 못해 본 것이다. 내년을 기약해야지. 여기 다 담지는 못했지만, 축하 인사로 연락 온 사람들, 밥 한번 먹자고 대전에 온 사람들, 카톡으로 보내준 선물들, 모두들 고마웠다.


25살이 되니 생일이라는 게 어릴 때처럼 기다려지는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한 살 더 먹는 만큼 책임감이 더 따른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다. 올해 한 해는 어느 때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상반기에는 회사에 있었고, 백수 생활도 해봤고, 하반기에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 새롭게 만난 인연도 있고, 놓친 인연도 있다. 지역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집을 떠나게 되기도 했다. 바쁘게 살아가는 하루에 누군가의 생일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축하한다는 문자 하나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숫자 4초를 쓴 이유

그런 의미에서 생일이라는 건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기회도, 막역한 인연에 연락하기 좋은 핑계도 되는 듯하다. 어릴 때는 어떻게든 사람들과 인연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랑 맞든, 맞지 않든 친구가 많으면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0대의 절반을 보내며 되돌아본 나의 인생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결국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인생을 살아내는 공식이 비슷하고, 삶에 중요한 가치들이 비슷한 사람들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내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스스로를 모르면 나와 비슷한 모양과 색을 가진 사람을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텐데 이제 나는 어렴풋이 그들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모로 행복한 생일 주간이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태어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의구심도 들었다. 고마운 사람들, 삶에 소중히 간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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