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 사용 한도를 초과했습니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by 미지

기말고사가 끝나고 휴대폰 캘린더를 열어보니 나를 기다리는 수많은 약속들이 보였다. 연말이 되면 사람을 많이 만난다. 만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난다는 건, 나를 설명하는 횟수도 같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웃어야 할 때 웃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분위기가 어색해질 기미가 보이면 먼저 한 발 나간다.

사회생활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이런 행동들이 성실함이 된다.


나는 그걸 꽤 잘해왔다. 어리고, 아랫사람이고, 괜히 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불편한 말을 삼키는 속도도 빨랐고, 집에 돌아와서야 ‘아까 그건 좀 힘들었네’ 하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이번 주는 유난했다.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면 마음이 채워지기는커녕, 비어 있었다. 피곤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됐다. 쉬어도 회복이 안 되는 느낌, 배터리는 이미 없는데 화면만 계속 켜져 있는 상태 같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오늘 사람을 만난 게 아니라
소비되었구나.


누군가의 하루를 위해 내가 쓰였고, 분위기를 위해 내가 조정되었고, 원활함을 위해 내가 조금씩 닳아 없어졌다. 그 자리에 있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집에 돌아와서야 그게 느껴졌다.

이상한 건, 모든 만남이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나고 오면 말이 많지 않아도 마음이 편해진다. 굳이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고, 나를 납득시키지 않아도 된다. 그런 시간은 에너지를 쓴 기억보다, 남아 있는 느낌이 더 크다. 그래서 더 분명해졌다. 이번 주의 피로는 일정 때문이 아니라 관계 때문이었다는 걸.


그동안 나는 너무 쉽게 말했다.


괜찮아요.
원래 이 정도는 하죠.
다들 그러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괜찮지 않았고, 이 정도라고 넘겼지만 내 기준에서는 버거웠다는 걸. 사회생활을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나를 다 써버린 뒤에야 ‘그래도 괜찮았다’고 합리화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사람도 충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충전은 혼자 있는 시간일 수도 있고,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일 수도 있다. 나를 소모시키는 관계와, 나를 남겨두는 관계를 구분하는 연습은 필요하다. 관계도 체력처럼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건 방전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아무도 만나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더 만났다. 예전에 가르치던 성당 청소년부 성탄제에 잠깐 얼굴을 보러 갔다가, 아이들이랑 한참을 놀다 왔다. 많은 사람들에 정신이 없었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몸이 확실히 피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벅찼다. 체력은 빠졌는데, 마음은 꽉 차 있었다.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는 늘 예측이 안 된다. 중요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옆 친구 이야기를 하고, 방금 한 말을 스스로 부정한다. 그런데 그 혼란 속에서는 내가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분위기를 살릴 필요도, 말의 온도를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됐다.


주말에 나는 소비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하루를 위해 쓰이지도 않았고, 원활함을 위해 나를 깎아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과장하면, 내가 가진 걸 자연스럽게 건네고 온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깨달았다. 충전은 ‘쉬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방향’ 문제였다는 걸.

이번 주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건 사람을 많이 만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나를 계속 맞추고 조정해야 했던 만남들이었다. 반대로, 체력적으로는 훨씬 힘들었던 주말의 만남은 나를 오히려 채워주고 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앞으로 내가 방전됐을 때는 여기로 와야겠구나.’ 아무 말도 잘하지 않아도 괜찮고, 괜히 어른스러울 필요도 없는 이 자리로.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를 소모시키는 관계는 조용히 나를 비워가고, 나를 충전시키는 관계는 시끄러워도 나를 남겨둔다는 걸. “힘들다”는 말이 꼭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편하다”는 말이 늘 조용하다는 뜻도 아니라는 걸.


연말이라 사람을 많이 만났을 뿐인데, 덕분에 나는 나를 충전하는 장소 하나를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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