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Dawn, New Day, New Life
연말에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다 “Betweenmas”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의 며칠간을 가리키는 비교적 최근의 신조어라고 한다. Between + Christmas, 크리스마스는 끝났는데 새해는 아직 오지 않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애매한 시간. 그래서 흔히 “일하는 것도, 쉬는 것도 아닌 상태“를 표현할 때 쓰는 단어라고 한다.
나도 이번 연말은 설렘이 가득하기보다, 무기력한 기분이 많이 들었다. 업무 집중력은 떨어지고, 오지 않는 이메일과 메신저 확인만 반복했다. “이건 내년에 하지 뭐”라고 일을 미루기도 했고, 잦은 회식 자리로 피곤은 누적되었으며, 한 해를 잘 보냈는지 되돌아보다 괜히 달성하지 못한 목표만 떠올라 자책하게 되고, 새해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혔다.
연구실에 있는 것이 컴퓨터 앞 자리만 지키는 일 같아, 휴가를 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12월 31일. 20년이 넘게 맞이하는 새해임에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법인지 갈수록 어려운 듯했다. 한 주에 2025년과 2026년이 공존한다니. 마지막 날인만큼 무리한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다. 무슨 심보인지는 몰라도, 마무리를 잘하면 한 해에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덜 것 같았다.
저녁 8시쯤 헬스장으로 향했다. 이제껏 러닝을 할 때 넘지 못한 마의 구간 5km를 뛰어보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매번 3.5km쯤 뛰면, ”충분히 뛴 것 같은데“ 싶은 마음에 발이 멈추고 만 것이다. 무작정 뛰었다. 이것도 못하면 삶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것만 같았다. 45분 정도 뛰니 5km를 다 뛰었더라. 생각만 했던 목표를 한 해가 가기 전에 달성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아 밤 12시가 되기를 기다리며 미루고 미루던 일을 마주하기로 했다. 휴대폰에 쌓인 연락처와 무의미한 사진들을 지우는 일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진첩에 사진을 지우고, 더 이상 필요 없는 연락처를 지우고, 불필요한 것들을 인생에서 비운다. 운동을 더 잘하려면 힘을 빼야 하고,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하고 싶은 말을 줄여야 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 먹고 싶은 걸 다 먹어도 안된다. 배우는 삶을 살려면 놀고 싶다고 매일 놀 수 없고,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는 무분별한 만남에 다 자리할 수도 없다.
아,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덜어내는 일이구나.
지혜롭게 나이가 드는 것은 무엇을 덜어낼지 분별할 수 있는 것이고, 슬기롭게 나이가 드는 것은 그 비워낸 자리를 어떤 것으로 채워나갈지 아는 것이다. 젊은 날엔 인생의 모든 것을 붙잡고 주위가 꽉 찬 상태로 살아가지만, 삶에 빈자리가 생기는 것이, 그리고 그 빈자리를 적당히 잘 유지하는 것이 잘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새해 복 많이 받아!
12시를 넘기고 오는 친구들의 연락 속에서 익숙한 단어들이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새해, 새로운 해. 마이클 부블레의 ‘feeling good’이라는 노래 가사에도 나오듯 It’s a new dawn, It’s a new day, It’s a new life 인 셈이다. 가끔 한없이 우울감에 빠져 인생을 다시 리셋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새해’라는 단어는 이렇게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생일 때도 그렇고 이런 일상적인 인사말에서 감사함을 느끼는 것이 정말 나이가 드나 보다 싶었다.
2026년을 맞이하며, 올해는 비우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의미 없게 빈틈없이 주위를 채우기보다는 덜어낸 자리에 필요한 것들을 과하지 않게 가지고 있고 싶었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어른이 되고 싶다.
건강한 식단을 하는 것이 몸을 위해 좋은 것을 채워 넣는 일이라면, 책을 읽는 것이 내면의 나를 위해 좋은 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엔 못해도 매달 1권은 읽겠다고 다짐했으나, 연구실에서 읽을 논문과 바쁘다는 각종 핑계를 대며 못 읽는 날이 허다했다. 그래서 새해엔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고민을 하다 꼭 읽고 싶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선택했다.
한 번 읽는 것으로 다 이해하기에는 내용이 꽤나 방대하고 아직 충분히 소화시키지 못해, 다시금 되새기며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연말 연휴, 그리고 돌아온 연구실에서 실험 중 틈틈이 읽을 때마다 정돈된 단어들과 소로의 생각에 마음이 차분해지고 복잡한 머리가 편안해졌다. 비워낸 자리에 앞으로 어떤 것을 채울지 설레고 기대되는 새 출발이다.
그대의 눈을 안으로 돌려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여태껏 발견 못 하던
천 개의 지역을 찾아내리라.
그곳을 답사하라.
…
진실로 바라건대 당신 내부에 있는 신대륙과
신세계를 발견하는 콜럼버스가 되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