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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Sep 02. 2023

Let’s keep going!

델마와 루이스(1993)-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 감독과 여성 서사를 사랑하는 나는 왜 이제야 이 영화를 보았을까…? 명작이니 꼭 보라고 남들이 귀에 못이 박히게 떠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앞으론 뭐든 찍먹 해봐야지 다짐하는 하루다. 1993년에 개봉하여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명작이라 손꼽히는 작품인 만큼 이제와 리뷰를 쓰는 게 참 멋쩍지만 엔딩 씬을 보고 뻥 뚫려버린 가슴을 내버려 두고 이대로 잠이 드는 건 불가능하니 이렇게 활자로나마 쏟아내 본다.



 전업주부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던 델마와 루이스는 여행을 떠나던 중 낯선 술집에 방문하는데, 강압적인 남편의 휘하로부터 벗어나 잔뜩 신이 난 델마는 한 남성과 가까워진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성은 델마를 덮치고 이를 발견한 루이스는 총으로 그를 위협한 후 델마를 구해내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남성의 성적 모욕에 충동적으로 그를 살해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스러운 델마와 루이스는 경찰에 자백해 봤자 자신들이 보호받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곤 멈출 수 없는 도피 여정을 시작한다. 멕시코로 떠날 계획을 세운 그녀들은 여러 사건 사고를 겪으며 이전과는 달라진 스스로를 깨닫게 되고, 목전까지 바짝 추격해 오는 경찰들을 피해 돌이킬 수 없는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야기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로드 무비 장르에서 우리가 흔히 보아온 이야기인데, 그중에서도 <델마와 루이스>는 참으로 유일무이한 영화다. 여성 두 명을 전면에 내세우며 오로지 남성들은 그녀들의 서사에 이용되는 도구일 뿐이다. 페미니즘이 주요 논제로 대두되는 요즘은 이런 영화 많지 않나 싶다가도 막상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건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정도…? 그마저도 여성 서사와 남자 주인공 맥스가 이야기의 쌍벽을 이루기에 온전히 <델마와 루이스>에 견주긴 어려워 보인다. 뭐 내가 모르는 영화가 또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름 시네필(?)이라 떠들고 다닐 정도인 나조차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다면….이하생략. 아무튼 2000년대도 아닌 1990년대에 그것도 남자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이라 금세 납득이 가능하다. 그의 작품 중 2012년 작 <프로메테우스>는 내가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애정하고 가장 많이 본 영화인데, 이 역시 파워 페미니즘 영화다. 언뜻 보면 SF 영화로만 보이지만 내면을 조금만 파헤쳐보면 온갖 페미니즘적 장치들이 깔려있다. <프로메테우스>를 처음 본 날에도 ‘30년대생 할아버지가 이런 영화를 만들어..?‘라며 놀라 뒤집어졌었는데 1993년 작품에서도 리들리 스콧 할아버지가 날 놀라게 하는군….



 이 영화에는 20대의 젊은 브래드 피트가 잠깐 등장한다. 듣기론 극 중 JD라는 역할을 통해 당시 무명이던 그가 단숨에 라이징 스타가 되었다던데, 이 역시 바로 납득이 될 정도로 그의 미모는 눈이 부셨다. 그렇기에 그가 델마의 뒤통수를 치는 장면에선 엄청난 배신감이 들었고, 배신감은 더 나아가 곧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감까지 갖게 만들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나는 이때의 기대감과 배신감이 굉장히 부끄러웠다. 그 역시 델마와 루이스를 희롱하던 다른 남성들과 잘생긴 외모를 빼면 다를 게 없는 존재인데, 길에서 만나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를 남자의 미모 때문에 함부로 기대하고 실망한 내 모습이 돌이켜보니 참 우스웠다. 누군가는 그가 델마의 각성 계기가 되었다고 해석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아니더라도 델마는 혼자 충분히 각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권위적인 남편을 두려워하면서도 말없이 여행을 떠나버릴 수 있는 강단 있는 여성이므로. 영화의 초반에는 사고를 겪고 바로 냉철하게 계획을 세워나가는 루이스와 달리 “어떡해!” 염불을 외던 델마는 그저 철없고 순진한 주부로 보였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마다 그 위기를 헤쳐나가는 것은 항상 델마의 용기 덕분이다. 엔딩씬 역시 막다른 길에 다다라 어찌할지 몰라 주저하는 루이스에게 델마는 외친다. “Let’s keep going!”




유튜브에서 <방구석 1열> 델마와 루이스 편을 보는데 이런 댓글을 발견했다. 영화 <내부자들> 속  영-차! 장면이 밈이 되고, 온갖 자극적인 폭행 장면이 판을 치는 영화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겨우 여자들이 유조선 폭파하는 게 뭔 대수라고. 여성 서사라 하면 일단 편협한 편견부터 깔고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성”이라고 구분 지을 필요 없다. 그냥 억압적인 삶을 살던 “사람”들이 억압을 깨고 떠나는 이야기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까칠하게 굴지 말고 영화는 좀 그냥 영화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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