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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Oct 13. 2023

2박 3일 동안 영화 여섯 편 부수기(3)

캐리어로 가득 찬 영화관을 보았는지

 10월 9일 월요일은 한글날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듯 토일월 3일간의 연휴 동안 여행을 즐긴 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다. 연휴의 마지막 날 나 역시도 2박 3일간의 짐을 들쳐 맨 채  부산역으로….가 아닌 다시 영화관으로 향했다. 국밥 한 그릇 후루룩 마시고 여유롭게 돌아가자니 지금이 아니면 다신 못 볼지도 모를 수많은 영화들이 눈에 밟혀 마지막 날까지 나는 두 편의 영화를 더 보고 돌아왔다. 지난 글에서도 말했다시피 영화제 솔플을 하다 보면 이따금 현자타임이 오는데, 마지막 날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화장실 거울 속에 레디백과 숄더백을 들쳐 매고 꾸역꾸역 영화를 보겠다며 영화관에 온 내 모습이 비치자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가…”따위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묵직한 짐더미에 몸이 피로해지자 순식간에 영화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마치 증식이라도 하듯 내 머릿속을 꽉 채울 때쯤, 다시금 머릿속을 말끔히 비워 영화를 선택하게 만들어 준 건 영화관에서 발견한 뜬금없는 광경이었다. 그날따라 영화관에 들어설 때마다 눈에 띄는 광경이 있었으니, 바로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캐리어 떼들이었다.


 나와 같은, 아니 나 보다도 더한 인간들이 영화를 보겠다며 20인치쯤 되는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며 영화관을 온 것이다. 그들은 처치 곤란 캐리어를 영화관 벽면에 일렬로 세워둔 채 신나게 영화를  본 후 다시 캐리어를 끌어 다음 상영관으로 이동했다. 수십 개의 캐리어들이 일제히 덜덜덜덜 소리를 내며 나와 같이 상영관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자니 큭큭거리는 웃음이 삐져나왔다. 나도 나지만, 아니 나보다도 이 사람들 정말 영화에 진심이었다. 그 모습이 조금은 미련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반갑고 동질감 마저 느껴졌다. 그래, 역시 영화는 메이저야…








5. 아그네츠카 홀란드-푸른 장벽

 이번 영화제 영화들 중 가장 보기 힘들었던,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던 영화는 <푸른 장벽>이다.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일부러 관객을 가둬두던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퍼니 게임>처럼 느껴지는 <푸른 장벽>은  슬프게도 현시대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참혹한 실화를 말하고 있다. 영화는 망명을 위해 벨라루스와 폴란드에 갔다가 그 어느 나라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중동 난민들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적 연출로 보여준다. 두 국가의 국경이 위치한 푸른 숲은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난민들을 잔인하게 내모는 “푸른 장벽”으로 묘사된다. 난민과 난민들을 핍박하는 군인들, 그들을 도우려는 활동가들, 그리고 방관하거나 외면하는 국민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에서 상황을 직시하게 만들며 관객으로 하여금 선과 악을 뚜렷이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해 고뇌하게 만든다. 영화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21세기에 아직까지도 이런 야만적 행동이 같은 인간에게 자행되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우리 인간이 역사 속 수많은 전쟁과 대학살이라는 과도기로부터 “함께” 삶을 살아갈 방법을 학습했고 결국엔 현재의 “지구촌”에 이를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지구촌이라 믿은 세계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여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고 집을 잃은  난민들이 이웃 나라에 망명 신청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푸른 장벽>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밟고 서있는 인간성의 크기를 의심하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다소 불편하지만 직시해야 할 진실을 흑백 영화로 담백하게 담아낸 이 영화를 지금 이 시점, 나는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


6. 파스칼 플랜트-레드 룸스

 이번 부국제에서 본 영화들 중 가장 세련된 연출이 돋보였던 작품인 <레드 룸스>. 영화 상영 직전 상영관과 같은 층에 있던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때우는 중 영화 관계자로 보이는 외국인 두 명이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남자분의 외모가 상당히 눈에 띄어 힐끔힐끔 훔쳐보다 상영시간이 임박해 자리를 떴는데 이게 웬걸, 영화가 끝난 후 GV를 위해 무대로 오른 <레드 룸스>의 감독이 바로 그 카페의 남성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감독님의 외모만큼 영화도 참 매력적이었다는 뭐 그런….에피소드. 아무튼 나의 세 번째 부국제의 마지막 영화로 선택된 <레드 룸스>는 꽤나 신선한 영화다. 특히 남성 감독이 “캘리앤”이라는 굉장히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표현한 방식이 매우 놀라웠다. 마치 영화 <아가씨>의 “히데코”나 <콜>의 “영숙”처럼 약간 미친 여자 같기도 하다가 연민과 동정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당최 속을 알 수 없어 호기심이 마구 생기는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인 캘리앤은 사실 히데코나 영숙보다도 더 묘한 감정이 드는 인물이다. 꺅꺅 거리는 피해자나 모성애가 넘쳐나는 어머니, 사랑에 죽고 못 사는 철부지 여성 캐릭터들로 넘쳐나는 영화판에서 캘리앤과 같은 입체적 여성 캐릭터는 여성 관객으로서 매번 느껴오던 그간의 영화적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준다. 사실 캐릭터뿐만 아니라 다크웹 범죄라는 소재를 다루는 연출 방식 역시 매우 훌륭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범죄/스릴러 장르의 영화인 만큼 조금의 스포도 감상의 재미에 마이너스가 될 것 같아 이만 말을 아끼겠다. 영화제를 다녀오면 보통 영화에 질려서 돌아오기 마련인데 반해 <레드 룸스>는 그런 나에게 파스칼 감독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불어넣어 돌아오자마자 그의 전작을 찾아보게 만들었다. 이 사람…정말 외모만큼 영화 감각도 매력적이다.








 오늘이면 스물여덟 번째 부산국제영화제가 폐막한다. 현실로 돌아와 밀린 일을 처리한 지 벌써 삼일 째지만 아직도 부산에서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한 영화들이 부디 국내 개봉하길, 아니면 최소한 OTT에라도 올라오길 바라며 이만 부국제 후기를 마치겠다. 내년에는 나의 네 번째 부국제 후기가 올라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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