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수명 단축 현장
나는 단연코 아침형 인간이다. 잠이 많아 주말이면 점심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평일 아침이면 알람이 네댓 번은 울려야 겨우 눈이 떠지는 그런 사람이지만,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아침형 인간은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는데 늦잠 자는 네가 무슨 아침형 인간이냐?"라며 따져 묻고 싶은 사람들은 진정하고 내 얘기를 먼저 들어봐야 한다.
취업 후 제대로 알게 된 임상병리사란 직업은 어릴 때 상상했던 적당히 전문적이고 적당히 우아한 그런 직업이 절대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적당히 '우아한' 직업이란 남들 쉴 때 같이 쉬고, 야근도 주말 근무도 없는 직업이다. 그런 우아함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병원에 발을 들여선 안된다는 걸 그 당시엔 전혀 몰랐다.
대개 응급실이 있는 병원이라면 검사실 역시 24시간 돌아간다.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실시간으로 응급 검사를 시행해야 하기에 임상병리사 역시 언제나 상주해야 한다. 가끔 야간 당직은 의사나 간호사만 하는 거 아니냐며 뭘 모르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이 답답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나조차도 취업 전엔 내가 야간 근무를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지금의 직장에 입사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곧바로 나는 야간 근무에 투입됐다. 주말도 공휴일도 없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저녁 5시에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 8시에 퇴근하고 그다음 날 저녁 5시에 다시 출근을 했다. 처음엔 15시간이라는 근무 시간이 꽤나 벅찼지만, 퇴근 후 다음날 저녁까지 쉴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으로 여유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몇 달씩 야간 근무를 지속하자 잠 패턴이 엉망진창이 되면서 오히려 시간에 늘 쫓기게 되었다. 아침에 퇴근한 후 점심즈음 잠에 들면 밤늦게나 돼야 깼고, 그럼 그 밤부터 다음날 출근 직전까지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출근 시간의 압박에 쫓겨 어떻게든 다시 자보려 밤새 잠과의 사투를 벌여보지만 결국 잠들기는 실패한 채 충혈된 눈으로 출근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서 잠이 절실해진 나는 졸리면 참지 않고 바로 침대에 뛰어들어 잠을 잤다. 지금 자지 않으면 또 언제 잠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렇게 일상은 사라지고 사람도 만나지 못한 채 외딴섬처럼 고립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야간 근무는 잠뿐만 아니라 내 식욕까지 망가뜨렸다. 어지간해선 남들에게 쉽게 뒤지지 않는 대식가인 내가, 수면 부족에 시달리다 보니 눈에 띄게 식욕이 저하됐다. 정해진 식사 시간 따윈 없이 이틀에 세 끼를 먹거나 가끔은 두 끼를 먹는 불규칙적 식사를 했다. 물론 야간 근무가 체질에 잘 맞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밤에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어 오히려 야간 근무만 평생 하고 싶다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낮과 밤이 바뀌는 일상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그 부적응의 결과로 10kg에 가까운 체중 감소와 다크서클, 그리고 생리불순을 얻었다.
지옥 같은 시간 끝에, 나는 다시 아침 근무로 돌아왔다. 아침 해를 보며 출근하자마자 곧바로 다크서클과 생리불순이 귀신같이 사라졌다. 체중도 긴 시간이 걸렸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러니 내가 주말에 늦잠 좀 즐긴다 해서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말한다면 참 억울하다. 나는 분명히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밤에 자야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야간 근무 중이다. 첫 야간 근무에서 배운 게 많아 이제는 그때보단 사람답게 살고 있다. 퇴근하고 밤에 푹 자기 위해 일부러 저녁에 격한 운동으로 기운을 쏙 빼놨고, 못해도 하루 두 끼 이상의 식사는 챙겨 먹는다. 확실히 애쓴 만큼 체중은 줄지 않았고, 아직까진 다크서클과 생리불순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느껴진다. 이 지긋지긋한 야간 근무가 내 수명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세계보건기구(WHO)에선 교대근무를 2A군 발암물질로 분류한다. 거기엔 DDT라는 우리가 잘 아는 살충제도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밤낮이 바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징징거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실제로 발암물질을 가까이 두고 일하는 중이다. 이런 걸 진작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가끔은 내가 이 직업에 너무 무지한 채로 뛰어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거지 같은 직장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성취도, 내면의 성장도 얻는다며 어떻게든 긍정적인 결론을 끌어내려 애써왔다. 어떤 일이든, 어떤 직장이든 분명 다 장단점 있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건강을 해쳐가는 일은 조금... 아니, 많이 곤란하다. 야간 근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어서 빨리 야간 근무를 안 할 수 있는 직급으로로 승진하거나 퇴사하든지 둘 중 하나뿐이다. 여기엔 그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이 오로지 택 1의 문제만이 놓여있다.
지금 당장은 첫 번째 택지로 향하고 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적성에 안 맞아도 이 일을 꾸역꾸역 붙들고 있는 나는, 갈 데까지 가본 뒤에야 더 이상 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후련히 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퇴사 전에 길을 찾으면 더 좋지만.
오늘도 나는 가슴 한편에 사직서를 품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임상병리사로 살아가는 게 맞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