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병리사로만 살다 죽을 수 있으면 다행이게(1)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을까

by 단비

임상병리사란 직업은 자의로 퇴사하는 일이 드물다. 대부분 계약직으로 일하다 계약 종료와 함께 병원을 떠난다. 그런데 가끔, 정규직 직원 중 아무런 예고 없이 조용히 사직서를 던지고 나가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남몰래 다른 살길을 마련해 두고, '더는 못 버티겠다.'싶은 순간 병원을 박차고 나선다. 그들 중 대부분은 병원을 나가자마자 원래 꿈꾸던, 계획해 오던 일들을 착착 진행했다. 일부는 대책 없이 그만두고 난 후 미래를 고민하는 듯 하다가도 그간 해보고 싶었던 일을 목표로 조금씩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전에 없던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다른 살길도 없는데, 이 일 말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조차 모르는데, 더는 못 견디겠다 싶어지면 나는 어떡하지? 1 자아, 2 자아, 3 자아까지 전부 갉아먹고 난 후에도 못 버티겠다면 그땐 어떡하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당장 퇴사할 게 아니더라도 나 역시 "다른 살길"에 대한 계획 정도는 세워놔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30대의 나이에 또다시 진로 탐색이라는 던전에 입장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임상병리학과에 입학하여 스물넷에 졸업한 뒤, 8년을 쉼 없이 임상병리사로 살아온 내가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막연히 떠올려본 첫 번째 다른 살길은 카페 창업이었다. 단순히 커피와 카페라는 공간 자체를 좋아해서 떠올린 후보다. 게다가 "사장님"이 될 수 있다는 월급쟁이의 로망이 한 스푼 더해져 꽤나 진지하게 생각해 봤지만, 생각보다 너무 큰 초기 자본과 카페야 말로 자영업자들의 무덤이라는 여러 후일담을 듣고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카페 창업은 단순히 커피만 잘 내린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인테리어, 브랜딩, 입지, 메뉴 개발 등등. 결코 '한 번 해볼까?'하는 쉬운 마음으로 뛰어들 수 없는 일이다. 카페는 손님으로 갈 때나 좋은 곳이구나, 깨달음만 얻은 채 바로 패스.


두 번째로 떠올린 건 부동산 공인중개사이다. 공인중개사 자격을 취득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충분히 직장 생활과 시험 준비를 병행할 수 있다고 한다. 꽤나 괜찮은 선택지 같았다. 당장 그 일을 할 생각이 없더라도 우선 자격증만 취득해 둔 후 추후에 시작할 수도 있으니 "다른 살길 찾기" 목적에도 적합한 직업이었다. 문제는 나다. 공부를 해볼까 하고 책상에 앉자마자 깨달았다. N년만에 연필자루를 쥐어본 나는 이제 책상에 지그시 눌러앉아 집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엉덩이뿐만 아니라 머리도 문제였다. 학업에 손을 뗀 지 오래돼긴 했으나, 취준 생활 중에도 공인영어 시험공부를 꾸준히 해왔기에 충분히 내가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옛날의 집중력과 이해력은 옅어질 대로 옅어졌다. 결정적으로 흥미가 전혀 안 생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애초에 부동산 중개업에 전혀 관심이 없을뿐더러, 생소한 부동산 관련 법들은 안 그래도 책상 앞에 앉은 엉덩이가 들썩거리던 내 눈에 잘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러니 만만하게 보고 시작하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두 번째 살길 후보 역시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공인중개사 공부를 잠깐 찍먹 해보면서 아무리 비상시 대비용이라 하더라도 흥미 하나 없는 일을 억지로 시작하는 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라면 다른 살길 후보에서 과감히 빼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맞는 일은 과연 뭘까? 꽤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을 땐,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고민 따위 전부 잊고 그저 임상병리사 일에만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내가 아무 대가 없이도 기꺼이 시간을 투자하는 일에 단서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가장 먼저 떠올린 제대로 된 후보는 '작가'였다. 사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할 때만 하더라도 글로 밥 벌어먹고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냥 평소에 글 쓰는 걸 좋아했고, 이왕 쓰는 거 남들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브런치를 시작했다. 몇 년간 글을 쓰면서 때때로 글태기가 찾아와 잠시 글쓰기를 멈춘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나는 다시 글쓰기로 돌아왔다. 한 번 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면 세 시간은 족히 걸렸지만 그 시간이 아깝거나 벅차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기꺼이 내 여가 시간을 글쓰기에 투자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글 쓰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혹은 엉덩이가 무겁다고 해서 다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작가가 되려면 누군가 기꺼이 읽어주고 기다려줄 만한 글을 써야 한다. 결국 재능의 영역이라는 것인데, 이 재능이라는 건 정작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브런치 작가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내 글이 영 엉망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닐까. 그렇게 브런치 작가 활동을 시작한 지 이제 4년 차가 되었다. 그동안은 짧은 단상 위주의 글만 써왔는데, 이제는 한 가지 주제로 좀 더 길고 깊게 써보려 한다. 그런 마음에 이 브런치 북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킬 때 쓰고 아니면 말던 취미생활에서 벗어나, 조금 더 나만의 글쓰기 패턴을 만들어가기 위해 요일을 지정해 연재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느낌이 오는 날 몰아서 몇 편을 쓰고 며칠간은 아예 손을 놓기도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기한을 만들어두니 글쓰기 굳은살이 조금씩 배기고 있는 듯하다.



혹시 몰라 시작한 "다른 살길" 찾기에서 작가라는 직업을 떠올렸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릴 땐 인터넷 소설에 빠져 밤낮으로 읽어댔는데,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써보기도 했다. 물론 결과물은 처참했지만…. 중고등학생 때도 생각해 보면 글에 대한 작은 열정을 품고 있던 것 같다. 따로 창작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이따금 교내 독후감 대회가 열리면 고민 없이 항상 지원했던걸 보면 말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돌이켜보니 나는 언제나 글쓰기와 함께 해왔다. 작가가 되겠단 결심만 하지 않았을 뿐 언제나 이 방향으로 문을 열어두었던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3n년 인생 최대 관심사가 뭐였는지 이제라도 확실히 깨달아 그 방향을 향해 페달을 밟을 수 있게 되어 정말이지 다행이다.


하지만 나의 다른 살길 탐색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살길은 여러 갈래일수록 더 좋은 법이니까. 다음 이야기에선, 글쓰기 다음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또 하나의 취미에 대해 써보려 한다. 힌트를 주자면... 매트 위에서 시작된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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