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마음 한편에 품고 사는 말이 있다. 권선징악.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한다는 뜻이다. 뚜렷한 계기는 없지만 살면서 꽤 많은 “징악”의 현장을 목격해왔기에 자연스레 권선징악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중학생 때 후배들을 괴롭히고 물건을 곧잘 훔치던 한 학년 위 선배는 나중에 어렴풋이 듣기론 보호관찰 대상이 되었다더라. 신입 직원이 입사할 때마다 온갖 텃새를 부리며 괴롭히는 것으로 유명하던 상사는 집안에 우환이 생기며 돌연 휴직을 했다. 영원한 비밀이란 없었고 유독 들킬까 봐 조마조마 해하던 거짓말은 결국 탄로 났다. 이런 일련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징악을 보고 듣고, 심지어는 직접 겪으면서 “악”을 행하면 언젠가 내게 “징악”이 돌아오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러니까, “악”을 행하면 안 되기에 “선”을 행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은지라 나의 이타적 행동이 반드시 내게 선한 보상으로 돌아오진 않았다. 지금 당장은 아무도 몰라줄지라도 열심히 일하면 언젠간, 누군 간 알아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일한 지 벌써 5년 차이다. 아무도 안 알아주더라! 오히려 왜 이렇게 미련하게 일하냐, 곰처럼, 바보처럼 굴면 너만 손해라는 소리를 들은 지는 4년쯤 된 것 같다. 이쯤 되니 아무리 오래 믿어온 믿음이라도 작은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기대하던 보상은 돌아오지 않는데 나는 어째서 타인에게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싶은 나의 마음은 어디에서 기원된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제목 그대로 다정한 것, 즉 친화력이 진화의 키포인트(key point)라 주장한다. 지금의 사람 종인 호모 사피엔스가 최후까지 살아남은 인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적자생존의 개념으로 보면 오히려 호모 사피엔스보다 머리가 더 크고 근육이 발달한 네안데르탈인이나 발전된 석기를 능숙히 사용한 최초의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가 최후의 인류가 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호모 사피엔스다.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사람 종에 비해 현저히 강력한 기술과 문화의 발전을 겪었는데, 이것의 시발점이 친화력이다.
친화력은 타인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게 하며, 지식을 세대에 세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게 해준다. 또 복합적인 언어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문화와 학습의 기반이 되었으며, 친화력을 갖춘 사람들이 밀도 높게 결집했을 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해왔다. 다른 똑똑한 인류가 번성하지 못 할 때 호모 사피엔스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협력에 출중했기 때문이다. (p.30)
대부분의 동물 종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걸음마를 뗄 수 있으나 우리 인간은 매우 무력한 상태로 태어난다. 울음이 아니면 의사소통이 불가하고 그나마도 무슨 연유에서 우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태어난 순간 야생에 버려진다면 우리는 대부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눈 맞춤을 이용하고 의존하는 유일한 종이다. 아기의 눈 맞춤은 부모로부터 보호를 유발하고 사랑을 불러일으키기에 우리는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 유력한 상태가 될 때까지 보호받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은 나의 가족, 지인, 심지어는 국적이 같거나 인종이 같다는 작은 공통점이 하나라도 존재한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을 돕기도 한다. 책의 저자들은 이 모든 것이 “자기가축화(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과정)”, 즉 친화력의 결과물이라 주장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어떤 사람 종보다도 소통과 협력에 능하기에 이것이 인지 능력 발달에 큰 영향을 주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토록 친화적인 우리 인간은 어째서 친화력과는 거리가 먼 비인간적인 행위를 자행하는가?
멀지 않은 과거엔 제노사이드가 성행했다. 나치즘의 유대인 대학살, 르완다 투치족 대학살, 보스니아 전쟁 등등. 당시엔 질병으로 사망하는 수보다 전쟁으로 사망하는 수가 더 많았을 정도로 우리는 엄청난 살인을 저질러왔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것을 보면 나는 필연적으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과연 다정한 종이 맞는 것인가? 과거의 많은 대학살은 인간의 본성이 결국 악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전쟁은 권선징악에 대한 나의 믿음에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인간의 본성에 의문을 갖게 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두 저자는 이러한 현상에도 역시 친화력이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은 같은 타인이더라도 아주 작은 공통점이라도 가진 사람은 내부인으로 여겨 외부인에 비해 더 친절하게 대한다. 같은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 더 나아가 같은 동양인이면 관대해질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외부인인 서양인에게는 야박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비인간화”는 우리가 그어놓은 선 밖의 외부인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근원이며 양심이라는 감정을 주관하는 우리의 신경망을 둔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비인간화 대상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덜 느끼기에 잔인성이 발현될 수 있다.
우리를 번성하게 만들어 준 친화력은 한편으론 우리를 잔인하게 만든다. 우리와 다른 인종을 쉽게 배척하고 소수 종교를 탄압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과학 기술이 아닌 사회적 해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통계적으로 인간의 구조적 불평등의 정도를 살펴보면 영장류의 조상 무리 시절과 제국주의가 성행하던 고대 국가 때 불평등의 정도가 매우 높고, 수렵 채집 시절과 입헌군주제가 도입된 시점부터는 불평등이 낮다. 독재자가 존재할 수 없도록 서로 견제하고 동시에 생존을 위해 채집물을 공유하던 수렵 채집 시절과 선거의 자유 아래 시민을 직접 대리하는 대리자가 통치하는 입헌군주제는 우리의 잔인성을 축소시켜주었다. 민주주의 확립은 이것을 더 극대화해주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을 바탕으로 세워진 민주주의가 인류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일례로 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살펴보자. 제국주의 시절의 전쟁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었다. 명분만 존재한다면 전쟁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여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를 따르는 지금은 러시아라는 강대국이 일으킨 전쟁에 많은 국가들이 유감을 표하고 있고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전범”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며 러 제제에 힘을 싣고 있다. 국가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글로벌 기업들 역시 러 제제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다정한 본성 속에 자리한 이 어두운 면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다. 이 형태의 정부가 직면하는 난제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천문학적 국가 채무, 도를 넘는 군사적 개입, 노쇠한 기간 시설, 만연한 유언비어, 고령화 사회 같은 문제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나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가운데 많은 것이 한 가지 근본적 문제의 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같은 편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다른 편에게는 잔인해지는 인간 본성의 역설 말이다. (p.256)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두 저자는 민주주의와 더불어 “접촉”의 영향력 또한 이야기한다.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던 시기, 그저 유대인 이웃이나 친구, 직장 동료가 있던 수 천명의 유럽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도왔다. 인종 분리 학교보다 다인종이 함께 다니는 학교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이 인종 차별을 덜 행한다. 여기서 접촉은 거창한 접촉이 아니다. 외부인과의 단 한 번의 대화나, 인사 정도만으로도 긍정적 영향이 발생한다. 우리는 접촉을 통해 “인간화”의 경계선을 더 먼 거리까지 확장할 수 있다. 즉, 비인간화를 방지할 수 있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왜 접촉에 적합하도록 설계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지 설명해준다. 우리는 내집단의 구성원들이 위협받을 때, 평소에는 타인이나 외집단에게도 무리 없이 잘 느끼던 공감능력을 차단시킨다. 이에 외부자들도 위협받는다고 느껴 상대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여기에서 보복성 비인간화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그 위협받는 느낌을, 아주 잠깐만이라도 없앨 수 있다면 다른 종류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답성 인간화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p.264)
책을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우리 인간이 왜 사회적 동물인지 진정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성과 철저히 단절된 여중, 여고 출신이나 남중, 남고 출신들은 졸업 후 갑자기 이성을 마주하는 환경에 당황스러워한다. 사춘기 이후로 가족이나 선생님이 아닌 이성과는 대화해 본 역사가 없기에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대학교에 입학하고선 처음 해보는 조별 과제에 진땀을 뺐었지만 경험이 쌓인 후부턴 귀찮긴 하더라도 진땀까진 안 흘렸다. 처음 가 본 해외여행에선 외국인들이 그렇게 두려웠는데 조금만 대화해 봐도 그저 언어가 다른 나와 같은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접촉을 통해 우리는 익숙한 공간과 편협한 사고방식을 넓힐 수 있다. 타인과의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사회를 보다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준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뚜렷하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는데도 나는, 우리는 어째서 이타적으로 행동하려 하는지. 이것은 나의 유전자에 각인된 행동 지침이자 우리 사람 종이 스스로를 번성하게 하기 위해 체득한 전략이다. 시대에 따라 개인주의가 성행하고 착한 사람을 일명 “호구”로 칭하며 조롱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쩌면 우리 사람 종의 역사를 모른 채 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요즘 SNS를 보면 종종 지인과 “손절”해야 할지를 묻는 고민 글이 올라오는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끝내는 것을 권한다. 지금 당장 나에게 도움보단 피해를 더 많이 준다는 판단이 서면 미련 없이 정리할 것을 추천한다. 당연히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딱 잘라 판가름할 순 없다. 하지만 관계를 끊어내기에 앞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과거에는 아니었으나 현재는 내게 큰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되는 관계가 있듯이, 현재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미래에는 바뀔 관계 역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회망을 현재의 판단만으로 규정짓지 말고 조금 더 지켜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비록 친화력은 비인간화라는 부작용을 낳았지만 결국 비인간화는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더욱 다정한 행동을 통해, 즉 친화력 그 자체로 자가 치유가 가능하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이타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우리 개인으로 있을 때보다 관계를 통해 연결될 때 더 유의미하기에 인간의 사회망에 속에 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내가 책을 읽고 생각을 공유하는 이 활동 역시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개입한 결과가 아닐까.
지금은 낡은 개념이라 치부되는 적자생존은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사회적 성공은 뛰어난 지식과 매혹적인 외모, 우월한 신체 능력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편견 말이다. 물론 많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인간의 다정함이, 사회적 접촉이 어떻게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번성하게 해주었는지 그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보시길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