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희 이모

다 같이 잘사는 사회

by 요기남호

어렸을적, 나에겐 여러 '이모'들이 있었다. 그 이모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하시던 계 모임의 고정 멤버 분들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여러번, 그 분들이 자기를 어떻게 믿고 계 왕주를 시켰는지 참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 분들은 그 동네에서 제법 잘사는 분들이었다. 남편분들이 철도공무원, 교사등 전문직에 종사하시던 분들, 그리고 책방과 시계/안경점을 경영하시던 분들이었다. 그 동네에서는 속된 말로 말깨나 하던 집안들이었다. 사모님들 또한 교육도 초등학교에도 다니지를 못했던 어머니보다는 훨씬 더 받으신 분들이었다. (어머니의 무교육은 전적으로 여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셨던 외할아버지 탓이다. 어머니는 공부를 하려고 국어책을 구해서 할아버지 눈을 피하려 담장 한구석에 숨겨놓으면, 외할아버지가 발견을 하곤 찢어 버리곤 하셨다 한다. 여자는 교육이 필요없다며. 우라질. 그때 내가 있었으면 할아버지에게 마구 대들었을텐데. 무슨 짓거리시냐고.. 1930-40년 대 한국 시골의 서글픈 풍경이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그런 분들이 초등학교는 문턱도 들어가지도 못해, 글도 몰랐던 어머니에게 계 왕주를 시켰을까. 그것도 남편도 없이 자식 셋을 기르던 가난했던 여인의 무엇을 믿고서.


그당시 어머니는 남편 (나의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고향 부안을 떠나 타지인 익산 (옛 이리)으로 홀홀단신 이사를 한 후 3-4년 가량이 지난 때였다. 처음 이사를 왔을때는, 큰 아들만 있었는데, 그 큰 아들은 남편이 데리고 다른 도시로 갔다고 한다. 처음 익산에 이사를 와서 어느 집 단칸방을 빌려, 친척들이 운영하던 음식점/술집 아가씨들의 빨래를 하고 옷을 수선해주며 사셨다. (그 집 주인 내외 분은 마동 할머니집이라고 불렀었다. 연세가 어머니보다 대략 20세 가량 더 많으셨던 그 분들은 어머니를 딸처럼 너무 잘 해주셨다고 어머니는 나의 귀가 닳도록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어려서 자랄때, 명절때마다 우리집에 고기를 사서 보내주시던 분들이다. 그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해야 한다.) 그 집에 일년가량 있다가, 후에 내가 태어난 고향집 동네에 이사를 가셨다. 그 동네는 그 당시에 신흥 중산층의 동네였었다. 익산 역과 옛 번화가에서도 제법 가까운 동네였다. 어머니의 꿈은 그 동네에서 가장 좋은 기와집을 사서 남부럽지않게 사시는 거였다. 그 동네에서 처음 3년 가량은 단칸방에 세를 들어 사셨다. 자세한 것은 모르나, 그때 아버지가 오셔서 같이 사셨다. 그 3년을 어머니는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했다. 후에 자식들이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기 전에는 말이다. 그때 낳은 자식들이 나의 누나 그리고 작은 형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바람기가 다시 도져서, 어머니가 나를 임신하여 배가 만삭일때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떠난다. 남쪽, 목포로. 주점을 하러. 떠나기 바로 전에, 그 동네에 그럴듯한 기와집이 매매에 나왔다. 그걸 겁도 없이, 어머니는 빚을 내어 덜컥 계약을 하셨다. 작은 체구에 참 강단이 대단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그 기와집 안방 아랫목에서 나를 낳으셨다. 남편도 없이. 한겨울이었다.


난, 어렸을적 '복덩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마치 우리 집에 복을 불러올 존재인양. 아마, 그 단어에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때 돌아온 아버지가 다시는 떠나지 말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램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매우 귀여워하셨다. 막내아들인 내가 세상에 나올때 당신이 곁에 없었었다는 미안함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자식들 중에 당신 얼굴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을까. 밥상에서, 엄하셨던 아버지의 무릎에 앉을 수 있었던 자식은 나 뿐이었던 기억이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고 8년이 좀 넘게 어머니는 홀로 자식 셋을 키우고 사셨다. 배운 것도 없는 여인이, 집을 사느라 제법 큰 빚도 끌어안고 있었다. 그래서, 방 2개는 세를 내주고, 다른 방들은 고등학생들 하숙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동네 이모들이 찾아와 계 왕주를 제안했다고 한다. 어떻게 삼남매를 키울거냐며. 계 왕주를 하면 재정적 도움이 될테니, 당신들이 계 회원으로 참여할테니 왕주일을 하라면서 말이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홀로 된 여인을 도와주려고 그렇게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 주신 것이었다. 어머니와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들이었는데.. 그 동네에서 내노라하던 집안 여인들이 거의 다 나서주셨으니, 어머니에겐 엄청난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 분들중에 공동왕주를 맡아주신 분이 영희이모다. 나의 어머니를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계가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보증을 서주신 분이다. 모든 실무적인 일, 매달 들어오는 돈, 나가는 돈은 나의 어머니가 다루었다. 곗날 마다, 영희이모는 우리집에 오셔서 어머니와 돈을 맞추어서 그달에 곗돈을 타는 사람에게 곗돈을 주는 작업을 하시곤 하셨다. 다른 날에도 자주 오셨었다. 어머니와 절친이 되셨다.


영희이모는, 동그란 얼굴이 참 고우셨다. 그리고 매우 자상한 미소를 항상 띄고 계셨다. 그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니, 고학력을 소유한 여성이셨다. 소설 <토지>를 다 읽으셨다하니.. 난, 영희이모를 참 잘 따랐다. 나의 어린시절 기억에서 영희이모는 따스함이란 단어와 맞닿아있다. 내가 만으로 8살 적에 전신마취 상태에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마취에서 깨어날때, 내가 처음으로 찾은 사람이 영희이모였다고 한다. 어머니가 아니고.. ㅋㅋ


코로나가 일상을 뒤바꾸기 전인 2020년 여름, 아주 오랜만에 영희이모를 찾아뵈었었다. 어머니와 함께. 연세가 90대 중반이신 영희이모는 심장병을 심하게 앓고 계셨다. 내가 기억하는 자상한 미소를 짓기에는 몸이 너무 아프셨다. 그래도 반가워하셨다. 당신이 매우 귀여워하던 내가 실로 오랜만에 찾아왔으니..


언젠가, 영화 <기적>에 대한 평을 하며, 나의 성공(?)은 다 나의 부모님 덕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정확히는, 부모님 뿐아니라, 이 이모님들 덕이 매우 컸다. 타지에서 흘러 들어와,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홀로 어리디 어린 삼남매를 키워야하는 한 여인을 보고, 안쓰러워 팔을 걷어붙이고 당신들의 일처럼 나서서 '계'라는 경제적 터전을 마련해주신 그 이모들 말이다.


그분들의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할까.. 벌써 많은 이모들이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영희 이모가 되어주는 정부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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