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서 혹은 여자로서
표지사진: 외할머니 (중앙), 어머니 (우측), 그리고 어머니의 사촌의 부인 (좌측)
나의 어린시절과 어머니에 대한 글을 몇개 올리자, 누나가 이런 질문을 해왔다.
'엄마가 아니고 여자로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엄마도 여자였어. 지금 엄마는 어떤 생각일까? 당신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서. 엄마가 아니고 여자로서.'
예전에 어머니는 총명하셨다. 계를 하시며, 덧셈 뺄셈을 암산으로 하시곤 하셨다. 학교문턱에도 못 갔지만, 그 집안사람들은 어머니가 공부를 했으면 크게 되었을 거라고 덕담을 하곤 했었다. 어머니는 딸 셋에 막내 아들이 있는 집안에서 둘째 딸이었다. 내가 자랄때, 가까운 외가친척들이 어떠한 중대한 결정을 할 일이 있으면 어머니를 찾아와 상의를 하곤 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당신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 있었다. 물론, 어머니의 인생에 중요한 결정의 순간들은 여럿이었을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부안에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얼마지나지 않아, 부안 유지라는 한 작자가 자신이 어머니를 보쌈해가지고 가서 어머니를 첩으로 삼겠다고 공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어머니는 홀로 그당시 신도시였던 익산(그당시엔 이리)으로 이주를 하는 결정을 하셨다. 신도시에서는 당신의 과거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고, 그 부안 유지같은 웃기지도 않은 몰지각한 작자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거라는 계산이었다.
지금 내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어머니의 인생 결정은, 어머니의 남은 50여년의 인생의 기로에서 내린 결정이다. 그러니까, 내가 만으로 8살일때,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려고 했을 때다. 익산으로 오신 후에, 삼년을 다시 같이 살다가, 나를 배에 품고 계실때, 아버지는 다시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떠났었다. 목포로. 그곳에서 양조장/술집을 운영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8년 후에 그 사업이 부도가 났다. 살 곳이 없어진 아버지는, 강한 생활력으로 삶의 터전을 탄탄하게 다져가고 있던 어머니에게 다시 돌아오려고 했다.
그때, 모든 이모들은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조언을 했다. 아마, 화를 내시며 언성도 높이신 이모들도 있었을 것이다. 뭐 그런 작자를 다시 받아드리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신 이모들도 계셨으리라. 대략 열분인 이모들 모두 같은 조언을 주었다. 한분만 제외를 하면 말이다. 유일하게 받아들이라는 조언을 해준 이모는 영희이모였다.
영희이모의 조언은, 어린 자식들의 교육문제였다. 그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조언. 그 조언은 그 당시 나의 큰형의 상황과 맞물려있었다. 큰형은 중학교때까지 공부를 제법했었다. 큰형이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할때는,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어머니와 같이 살 던 때다. 아버지가 다시 떠나는 그 해. 그때, 아버지는 큰형에게 공업고등학교를 가라고 결정을 하였다. 큰형은 물론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싶어했다. 학교 담임선생님까지 집으로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큰형은 공부를 잘하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내시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막무가내로 큰형에게 공고 진학을 명령했다. 어머니가 그 당시를 회상하시면서, 그 당시는 당신은 교육문제는 전혀 몰라서 당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었다고 후회가 막심하셨다. 어머니의 회상으로는, 아마 그때 벌써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당신은 곧 떠날테니, 큰 아들은 공고를 졸업하고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도와줘야한다는 구상이었던 모양이다. 내 참. 빌어먹을. 이렇게 잘못된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의 인생이 망쳐진다. 결국, 큰형은 공고에 진학했다. 그리고, 공부에 취미를 잃고, 학업을 놓아버렸다. 비슷한 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큰형의 인생은 꼬이지 시작했다. 큰형은 아버지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나라도 큰형의 처지에 처하면,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삶에서 벌여놓은 커다란 업보 중의 하나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를 다시 받아들였다. 대다수의 이모들의 조언을 뿌리치고, 유일한 영희이모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어린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그러니까, 어머니의 결정은 '엄마'로서의 결정이었다. 어린 자식들의 미래를 위한 결정. 누나는 그 결정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로서.
내가 어머니였다면, 그때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1970년 초였다. 어머니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있었던 듯 싶다. 무엇보다, 어머니는 삶에 치여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어린 삼남매를 잘 먹이고 잘 키울까하는 생각이외의 다른 생각을 하기에는 삶이 너무 힘에 겨웠다. 남편이 떠난 후, 매일 새벽에 일어나 막내아들을 보재기로 등에 업고, 부엌에 나가 하숙생들 아침밥과 점심 도시락을 만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고 나서야 막내아들을 방에 눕히고 당신도 겨우 뿌러질 듯한 허리와 숨을 잠시 돌릴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막내녀석은 순해서 등에서 보채지 않았다. 그후엔, 학생들 빨래를 해야했고, 방청소를 해야했고, 어떤 때는 곗돈을 받으려 다른 동네에 사는 계 회원 집에 가야했다. 다시 돌아오면, 저녁 준비를 해야했다. 일상이 너무 바빴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텨야하는지가 유일한 걱정이었다. 큰아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타들어갔다. 당신이 심적으로 얼마나 의지하던 착한 큰아들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남편이란 작자가 다시 와서 같이 살겠다고 한 것이다.
어머니가 어떤 결정을 했어도,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결정을 했어도, 난 장성을 한 후에, 그 결정을 존중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내가 공부를 아버지가 돌아오신 후 처럼 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아버지는 말년에 어머니에게 참 잘 하셨다. 젊었을 적에 어머니에게 너무 못쓸 짓을 하셨다며, 돌아가시기 전에 백분의 일이라도 갚으시겠다며 참 잘 하셨다. 밥상도 차리시고, 설거지도 하시고. 말년에는 무슨 일이던 어머니가 큰소리를 치시면 아버지는 마음에 안들면 그저 끙하고 돌아누우셨다. 숨죽이고 사셨다. 그 말년의 시간이 어머니의 결정이 잘 된 것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어머니에게 최소한의 위로가 되었을까.
아버지가 세상을 뜨셨을때, 어머니는 많이 우셨다.
다시, 나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내가 어머니였다면... 나도 받아들였을 것 같다. 힘들었겠지만. 그러나, 자식들이 다 커서 떠난 후에는 황혼이혼을 했을 것이다. 그때 아무리 아버지가 잘 했어도, 황혼이혼을 감행했을 것이다. 괴로운 옛날 생각을 하며 남은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즘, 어머니는 허무하신 듯하다. 연세가 있으신 까닭인지, 누나의 말로는 '엄마 모습은 아무생각없이 더이상 생각할 필요없는 표정이어서 슬프다'. 지금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