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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기우진 Mar 27. 2022

이승윤의 <너의 의미> vs 임재범의 <여러분>

*표지사진: 가수 김창완


최근에 유투브에서 이승윤의 노래 <너의 의미>를 보았다. 김창완롹밴드 산울림이 1984년에 내놓은 곡을 편곡한 것이다.


이승윤은 2020-2021년에 걸친 3개월 간의 겨울에 방영된 싱어게인 1에서 1등을 하며 세상에 문득 등장한 가수다. 사실, 그때 나는 이무진을 응원했었다. 이무진의 독특한 목소리와 20대초반이라는 젊음에서 나오는 패기발랄함에 매료되어있었으니까. 이무진이 부른 <누구없소>와 <꿈>등은 대중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승윤은 이무진이 가진 목소리는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윤은 이무진이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 소견으론, 깊은 인문학적 소양이다. 이 두 가수가 발표한 자작곡들을 비교해보면 알 수가 있다.. 이제, 나도 이승윤의 팬이 되었다. 뭐, 내가 팬이라함은, 유투브에서 그 가수의 노래를 가끔 들으며, ‘아..’하며 감동을 받는다는 것 뿐이지만.. ㅎ


저번주에 우연히 이승윤의 <너의 의미>를 유투브에서 보게 되었다. 그 무대 한 귀퉁이에서 김창완은 이승윤이 노래하는 것을 보며 기쁨과 대견함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하는 감동이 밀려왔다. 이승윤의 편곡은 기가막혔다. 이승윤은 편곡의 대가인 듯하다. 그 링크를 한 지인에게 보냈다. 그러자, 그 지인은 다른 링크 하나를 나에게 보내왔다. 바로 임재범의 <여러분>. 한국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2011년의 그 전설의 공연말이다.  이승윤의 이번 공연은 임재범의 11년 전의 공연의 ‘오마쥬’가 아니냐는 평과 함께.. 의상도 그렇고 퍼모먼스도 비슷하고라는 평과 함께..


이 두 가수의 공연 모두 감동적인 공연이다. 어느 공연이 더 낫나란 질문은 무의미하다. 여기에서 난, 이승윤의 <너의 의미> (2022년)와 임재범의 <여러분> (2011년)이란 두 음악이 어떻게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느냐를 이야기하고 싶다. 매우 주관적인 평이다. 이런 평은 맞고 틀리고가 없다. 그저 나란 개인의 취향이다.


두 공연에서 두 가수는 비슷한 복장이다. 검은 바지, 검은 셔츠, 그리고 흰 자켓. 그리고 중간에 무릎을 꿇는 모습. 관중과 소통하는 모습. 공연의 구조와 스타일도 비슷한 듯하다. 두 노래에 ‘너’라는 호칭이 많이 나온다는 점도. 그러나, 거기까지다. 비슷한 점은.


https://www.youtube.com/watch?v=mbq4II_EOvE


나에겐 고등학교 졸업반인 딸이 있다. 지난 4년동안 사춘기를 호되게 치른 딸이다. 내가 밑바닥에 내던져저서 딸과 내가 서로 어찌할바를 모르던 3-4년전에는 아마 임재범의 <여러분>을 같이 듣고 싶었을 것이다. 서로 소통을 어찌해야하는지, 소통이 가능한 통로가 과연 남아있는지 조차가 의심스러운 그런 절망적인 상태였다.


임재범의 <여러분>에서 ‘너’는 한 개인을 지목하지 않는다. 대상은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불특정다수인 <여러분>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향한 절규다. 외로움에 사무친 한 인간의 절규. 어디에 ‘너’가 있느냐는 절규어린 호소다.


임재범은 대중에  나타나지 않는 가수다. 2011 <나가수> 출연한 이유는  당시 그의 아내가 암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병원비를 벌겸,  아내에게 노래를 바칠 , 출연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처절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임재범은 온몸으로 노래를 불렀다. 특히 노래 <여러분> 임재범 자신의 그때 상황과  들어맞는 곡이었다. 딸아이는 그때 11.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처지. 그래서 임재범은 <여러분> 부르며 절규한다. 형제와 친구는 어디에 있느냐고. 슬픔과 기쁨을 같이 나눌 형제와 친구말이다. 그리고 무대에서 눈물을 보인다.  무대를 지켜보던 관중들도, 다른 가수들도 같이 운다. 가수와 관중이 하나가 되어 눈물을 흘리는, 아마도,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유일무이한 공연이었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유투브를 보는 사람들은 거의가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외로움에 사무쳤던 과거가 떠오르기 때문일까. 그 무대가 끝나고 왜 울었냐고 물었더니 임재범은 말했다한다, ’사실 친구가 없어요 단 한명도. 죽마고우라고 하죠? 아주 사적인 얘기까지 털어놔도 허허 웃어줄 친구가 없었어요. 그게 그리웠나봐요.’ 처참한 상황에 처했는데 하소연을 할 친구하나없는 상황. 그런 상황에 처한, 외로움에 사무친 한 인간이 눈물로 부를 수 있는 곡이 <여러분>이다. 임재범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아니 온몸의 모든 세포에서 뿜어나오는 깊고 처절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다. ‘상처받은 사자의 처절한 포효다’라고 평을 한 음악평론가가 있었다고 한다. 적절한 평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번 듣기는 힘들다. 적어도 난. 들을때마다 매번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매어지니까. 처절하게 슬프던 절망의 과거로 자꾸 나를 다시 밀어넣는 듯하니까. 그래서 그만 헤어나고 싶다.


그후 임재범은 <여러분>을 다시 한번 더 부른다. 2020년에, <열린음악회>에서. 가수데뷔 30년을 기념하는 공연이었을 것이다. <나가수>때부터 9년이 흐른 때다. 그의 아내는 불행하게도 암으로 세상을 뜨셨다. 딸아이를 남겨둔채. <나가수>때 임재범은 삭발을 한 모습이었다. 암투병을 하던 아내와 함께하기 위한 삭발이 아니었을까. 2020년의 임재범은 긴 장발의 모습이다. 그리고 목소리가 2011년에 비교하면 조금 가볍다. 그래서 혹자들은 <나가수>때의 공연보다 감동이 덜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난, 그 유투브를 보며, 다행이다란 생각을 했다. 임재범이 잘 이겨내었구나, 스무살이 되었을 딸아이도 잘 컸나보구나하는 안도랄까. 난, 임재범이 앞으로도 2011년의 <여러분> 같은 공연을 할 필요가 없었으면 한다. 그런 공연은 처절하게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야만 나올수 있는 공연이니까. 대중에게는 위안이 될지 모르지만, 가수 자신에겐 너무 혹독하다. 난, 임재범과 그의 따님에게 앞으로 행복한 나날들만 있기를 기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6vmrhRr7WM


이승윤의 <너의 의미>는 처절한 노래가 아니다. 이승윤은 이 노래를 휘파람으로 시작한다. 경쾌한 휘파람. 물론, 락이라는 음악장르이므로, 감정이 부풀려지고, 음악이 웅장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처절하거나 절망감과는 거리가 먼 공연이다. 원곡을 1980년대에 내놓았던 그룹 산울림의 성격 또한 그렇다. 그 암울하던 80년대에 산울림은 절망감 처절함과는 거리가 매우 먼 노래들을 불렀었다.


<너의 의미>는 불특정다수에 대한 노래가 아니다. 꼭집어 ‘너’라는 특정인물이 있다. 그 ‘너’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다.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너의 작은 말과 몸짓이 얼마나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고백하는 노래다. 그 고백을 ‘너’가 받아줄지 안받아줄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저 고백할 따름이다. 슬픔은 있으나 간이역에 코스모스로 피어난다. 간이역에. 잠시 머무는 간이역. 아름다운 코스모스로.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


요즘 난, 딸아이와 일주일에 한두번씩 음식점에서 점심이나 이른 저녁식사를 같이 한다. 사춘기의 긴 터널을 벗어난 듯하다. 여러 대학에서 입학허가를 받아서인가. 딸아이의 표정이 밝다. 실로 오랜만이다. 1-2주 후엔, 그 대학들 중에 2-3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그리고 어느 대학에 갈지를 결정할 예정이다. 다행이다. 딸아이가 잘 버텼다. 나도 절망의 시간은 벗어난지 오래다. 요가로. 이젠, 딸아이와 술 한잔 같이 할 수 있고, 서로 낄낄댈 수가 있게 되었다. 기쁘다.


지금 딸아이와 어떤 노래를 같이 들었으면 할까, 이승윤의 <너의 의미>와 임재범의 <여러분> 중에 말이다. 난, <너의 의미>를 택하겠다. 감동은 덜하겠지만 마음의 여유가 있는 노래이니까. 딸아이의 미래에 <여러분>을 들으며 위안을 삼게 될 절망의 순간이 없었으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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