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위원회 (Interim Committee)
* 이글의 대부분은 이미 이 브런치에 올렸었다. 여기에 약간의 첨삭을 한 후에 다시 올린다. 글의 연속성을 위해.
1945년 5월, 뉴멕시코주 북중앙의 파자리토 고원지대에 위치한 로스 알라모스 (Los Alamos)에서는 맨하탄프로젝트가 최종단계로 치닫고 있었다. 한달 전인 4월 12일, 갑작스런 루즈벨트 대통령의 죽음으로, 대통령이 된 트루만은 임박한 원자탄에 대한 정책을 논의하는 '중간위원회(Interim Committee)'를 결성한다. 대통령이 되기전, 당시 트루만 부통령은 맨하탄프로젝트에 대해 전혀 몰랐었다. 그토록 그 프로젝트는 극비사항이었다.
그당시 전쟁담당 장관이던 헨리 스팀슨을 위원장으로 하고, 그 당시 트루만정부에서 성공적 전쟁수행을 위한 과학연구정책을 이끌어가던 저명한 화학자 제임스 코난, 공학자 배니바 부시, 물리학자 칼 콤톤, 그리고 국무부 차관보 윌리엄 클레이톤과 해군차관 랄프 바드 가 멤버였다. 그리고 트루만대통령의 의중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또 한 멤버가 추가되었는데, 그는 2개월 후인 7월3일에 국무장관에 임명된 제임스 번즈였다. 이 위원회는 5월 한달 동안 네차례의 모임을 가지고, 원자탄발명이 미치는 군사적, 외교적 영향을 논의하고, 미정부가 태평양전쟁에서 어떻게 원자탄을 사용해야하는지, 종전 후에는 원자탄과 원자력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고 관리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그 보고서를 트루만에게 전달하였다.
여기에서, 히틀러는 이미 4월 30일에 자살을 하였고, 독일은 각각 5월 7일과 9일에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무조건적 항복을 하였음을 기억하여야한다. 그러니까, 이 중간위원회는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난 후라는 것이다. 이제, 아시아전선에서 일본제국주의와의 전쟁만 남은 상태였음을 기억해야한다.
중간위원회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를 한 사항은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었다. 이 위원회가 고려한 미국의 외교정책에 어떻게 원자탄이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중간위원회의 결론은 두가지다. 첫째는 미국의 원자탄과 원자력사용의 독점을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5월 18일 모임에서 위원회는 미국이 원자탄을 비롯한 원자력 기술에 대한 독점을 얼마동안 유지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부시와 코난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때 소련이 3-4년이면 따라올 수 있다고 보고한다. 이 두 과학자의 예견대로, 1949년에 소련은 원자탄실험에 성공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52년에 영국이, 1960년에 프랑스가, 그리고 1960년대 중반에 중국과 이스라엘이 원자탄보유국이 되었다. 이에 반해 그로브장군은 미국이 20년을 독점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로브의 주장에는 미국이 원자탄생산에 필요한 원료 공급에 대한 세계적인 독점을 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1943년부터 이미 그로브는 전세계에 매장된 우라늄에 대한 미국의 독점을 위한 노력을 주도해왔었다. 1944년에 미국은 우라늄을 비롯한 원자력에 쓰일 모든 물질과 그 물질에 대한 기술개발을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 삼국이 독점을 위한 공동노력을 기울인다는 협약을 맺었다. 그 당시에는 우라늄이 매장된 나라는 미국, 캐나다, 벨지움의 식민지였던 콩고 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콩고와 매장된 우라늄을 이 삼국에만 공급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소련에는 우라늄이 매장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로브는 향후 20여년 간 미국이 원자탄에 대한 독점을 할 수 있다고 강하게 믿었다. 그리고 그 주장을 중간위원회의 핵심멤버였던 번즈가 적극 동조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둘째는, 원자탄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사전경고없이 실제 투하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원자탄이 발명이 되기도 전에 이미 트루만 정부의 중간위원회는 일본 본토에 투하되어야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결론은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정부의 외교정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소련과 전쟁 후에는 어떠한 관계를 맺을지가 핵심이었다.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소련을 적으로 삼을 것인지를 결정해야했다. 일본과의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하는지는 전후에 소련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와 직접적 연관이 있었다. 그래서, 맨하탄프로젝트의 성공여부는 트루만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결정짓는 주된 요인이었다.
1945년 2월, 루즈벨트대통령이 죽기 두달전, 그 당시 연합군을 이끌던 3대 강국,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이었던,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이 얄타에서 만나, 전쟁이 끝난 후에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위한 세계체제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얄타회담이다. 미국과 영국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체제와 소련으로 대변되는 공산주의체제가 전후에 어떻게 세계에서 특히 유럽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가 있느냐의 문제가 그 회담의 주요 의제였다. 얄타회담이 열리던 시점에는 이미 히틀러 독일의 패망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미국과 영국 주도의 서방연합군은 이미 프랑스와 벨지움에서 독일을 퇴치하고, 독일의 서부 국경에서 독일군과 싸우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이미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에서 독일을 퇴치하고, 독일 동부를 침범하여 베를린으로부터 65킬로미터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얄타회담은 루즈벨트가 원해서 열린 회담이다. 루즈벨트가 그 회담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그 당시 미국이 일본과 벌이고 있던 태평양전쟁에 소련이 군사적으로 참여해주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은 일본의 패망을 재촉하고, 일본과의 전쟁으로 인한 미국 군인의 사망자 수를 최소화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얄탸회담에서 세 지도자가 합의를 본 사항중에는, 전후에 독일을 미.소.영.불 4대국이 분할통치하고, 독일의 비무장화와 비나치화하는 것 이외에 유럽을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나누어, 각각 서방 즉 미.영의 영향과 소련의 영향하에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모든 국가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가급적 빨리 실시하여,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부를 결정하도록 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을 언제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독일이 항복한 후, 2-3개월 내에 일본과 전쟁을 개시하겠다는 약속이었다.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히틀러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때는 1940년 6월이다. 그후 유럽 본토에서 독일과 뭇솔리니의 이탈리아의 세력확장은 가속도가 붙었다. 히틀러의 소련침공은 시간문제였다. 소련은 다가올 독일침공에 대비하기위해 극동아시아에서 대면하고 있던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저 했다. 유럽전선과 극동전선에서의 두개의 전쟁을 치르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일본도 그당시에는 중국과의 전쟁에 바빠서 소련과의 전쟁에 나설 여력이 없었다. 두 국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이루어진 불가침조약이었다. 그후 두달이 지난, 1941년 6월 22일 히틀러 독일은 소련을 기습적으로 침공하였다. 그후 거의 4년간의 기나긴 전쟁동안, 소련은 1천만명 가량의 군인 사망자를 포함하여 2천 4백만명가량의 사망자를 낸, 독일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뤘다. 이차대전동안 유럽서부전선에서 영국과 미국의 군인 사망자들을 합한 숫자가 8십만명 정도였다는 사실은 소련이 독일과 벌인 유럽동부전선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에게 한 약속을 지킨다. 히틀러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던 1945년 4월 5일,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파기한다. 그리고 1945년 8월 8일, 소련 외무장관 비야체스라브 몰로토브는 일본대사에게 소련의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날 무려 백만명의 소련 군인들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국의 경계를 넘어 파격지세로 진격한다. 독일이 항복한 날인 1945년 5월 7일 부터 정확히 3개월이 지난 날이었다.
미국은, 트루만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