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적 중도주의
부처의 본명은 싯다르타 가우타마였다. 현재의 네팔인 그당시 샤카공화국의 왕자였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29세에 출가를 하였다. 출가를 하기전, 16세에 콜리야 왕국의 공주였던 야쇼다라와 결혼을 한 후에 아들 라훌라를 가졌다한다. 그러니까, 아내와 10대의 아들을 버리고 출가를 한 것이다. 그당시 인도에서는 젊은이들이 득도를 위해 출가를 하는 것이 흔했다고 한다. 나중에 싯다르타가 득도를 한 후에, 야쇼다라와 라훌라도 불교에 귀의를 하였다한다.
이 에세이에서는, 싯다르타가 왜 불교를 창시했느냐를 이야기하려 한다.
싯다르타는 29세에 출가를 한 후에 6년동안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깨달음을 얻기위해 고행을 하였다. 그리고는 35세에 대각을 이루었다한다. 그 깨달음의 가르침이 불교가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인도에는 다른 여러 수행방법들이 있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그 수행방법들을 거의 섭렵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요가다. 싯다르타가 남쪽에 위치한 (현재 인도 북부)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그리하에 가서, 그곳에서 브라만교의 행자에게서 요가를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그 요가가 득도에 올바른 수행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자신만의 수행방법으로 득도를 한다.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을 함으로써 말이다.
자, 왜 싯다르타는 요가를 버렸을까?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나의 해석이다.
위의 질문에 대한 답에 접근하기위해,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가르침과 요가철학의 가르침이 어떻게 비슷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살펴보자.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기위한 수행은 팔정도로 요약된다. 정견 (right view), 정사유 (right resolve or intention), 정어 (right speech), 정업 (right action), 정명 (right livelihood), 정정진 (right effort), 정념 (right mindfulness), 정정 (Smadhi, right concentration) 이 그것이다.
요가에서의 팔정도 (Ashtanga)는 다음과 같다, Yama (금계, 도덕적 규칙), Niyama (권계, 스스로의 정화), Asana (육체적 자세), Pranayama (호흡조절), Pratyahara (감각조절), Dharana (집중), Dhyana (명상), Samadhi (깨달음).
이 두가지의 수행방식을 살펴보면, 불교의 팔정도는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과 얽힌 삶속에 나 자신을 어떻게 세우고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맫고 살아가야 득도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수행방식이지 않을까. 정견과 정사유는 내 자신을 어떻게 올바르게 세우는지를 말하고, 나머지 5가지 단계는 모두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가르친다,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그런 수행 끝에 혹은 수행 중에, 정정, 즉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에반해, 요가의 팔정도는, 물론 금계와 권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하는지를 말하지만, 그 다음의 다섯단계에서 보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단련하고 수행하는지에 집중해있다. 그중에 아사나가 현대 서양에서 요가라고 여겨지는 육체단련이다. 아사나는 그 다음 단계인 프라나야마와 프라티야하라을 하기 위한 선제 수행이다. 프라나야마와 프라티야하라를 하려면 결가부좌 상태에서 오래 명상을 해야하는데, 그러려면 몸이 아주 유연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의 팔정도에서는 아사나 즉 육체적 단련은 없다. 왜? 이 질문은 왜 싯다르타는 요가를 수행하다가 그만두었는지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 내 소견으로는, 싯다르타가 아사나를 수행방법에서 버린 이유는 아사나 수행방식이 자신을 비롯한 일반사람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수행방식이기 때문이었다.
부처가 득도를 하여 얻은 깨달음은 '변혁적 중도주의'라 할 수가 있다. 이걸 설명하려면,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차이점에 대한 나의 개똥철학을 풀어야한다.
물리학은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학문이다. 물리학법칙은 그 법칙이 적용이 되는 모든 물질과 현상에 똑같이 적용이 된다. 예외가 없다. 예로, 중력법칙은 질량을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들 간에 생기는 끌어당기는 힘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 중력법칙 앞에서는 모든 물질은 이 점에서 똑같다.
인문사회과학은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설명하려는 학문이다. 물리법칙과 다른 점은, 인간은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변수로 인간들의 분포를 만들면, 항상 벨커브 (Bell Curve)가 나온다. 예를 요가로 들어보자. 내가 아쉬탕가요가를 시작한 후에, 주위에 있는 대략 20명 정도에게 요가를 권했다. 그중에 두세사람만 시도를 했고, 그리고 오직 한 사람, 나의 중국인 제자,만이 지금도 요가를 수행하고 있다. 왜? 요가는 고통스럽고 어려우니까. 구글에 의하면 세계에서 요가를 수행하는 인구는 3억이다. 인도 사람 중에서 오직 11%만 요가수행을 한다. 미국에서 요가를 수행하는 사람들 중에, 일주일에 5번 이상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오직 6% 뿐이다. 일주일에 2-4번하는 사람들은 31%, 일주일에 1번하는 사람들은 22%, 한달에 여러번 하는 사람들 14%, 한달에 한번 하는 사람들 6%, 그 이하로 하는 사람들 21% 다. 이 분포를 횟수를 변수로 하여 그리면, 벨커브가 나온다.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이 21%나 되긴 하지만. 내 의견으론 이사람들은 요가를 한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물론 상위 6%에 속한다. ㅋ 이렇게 벨커브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떠한 사회과학법칙도 '균일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지구적 환경/생태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어떤 이는 (김종철이 한 예) 자본주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야한다고 하고 (생태주의), 어떤 이는 (백낙청) 이 문제를 근대의 이중과제, 즉, 자본주의에 적응함과 동시에 극복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여러 주장에 접했을 때, 우리가 물어야할 질문은, 어떤 주장이 올바르냐가 아니다. 올바른 질문은, 어떤 주장이 현실적으로 가장 최선이냐다.
물론, 어떤 이에겐 자본주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방식이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더욱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적응하려는 욕망을 완전히 버릴 수가 없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가장 최선의 방안은, 그리고 유일하게 실현가능한 방안은, 적당한 성장과 탐심의 절제를 통한 근대의 이중과제 수행이다. 이 방식만이 대다수의 사람들 (벨커브에서 중간에 위치한 대중들)이 수행가능하다. 물론, 자본주의 이전의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노력 또한 소중하다.
부처가 택한 득도 수행방식은 부처 자신을 포함한 벨커브의 중간에 위치한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을 위한 수행방식이었다. 요즘 말로는, 변혁적 중도주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나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아사나를 수행의 중요한 단계로 여기며 수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요가가 몸에 너무 좋다고, 이 수행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추천해봐야, 따라오는 사람도 별로 없지 않은가.
나의 소견으로는, 인문사회과학에서는 자연과학에서 처럼, 한 법칙 혹은 사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가 없다. 올바른 접근법은, 어떤 사상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행할 수 있는 '최적의' 사상이냐를 물어야한다. 물론, 다른 더욱 어려운 수행방법 (사상) 또한 허용/장려되어야한다. 지향점이 같다면, 여러 사상이 공존 소통하며 서로 배우며 더욱 많은 사람들이 그 지향점을 향해 노력하도록 해야하는 것이 인문사회분야에서의 올바른 접근법이 아닐까.
불교와 유교 등 동양사상에서 중도 혹은 중용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벨커브에 있지 않을까?
* https://ko.wikipedia.org/wiki/석가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