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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y After Trinity 2

by 요기남호

표지사진: 로버트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는 1904년 뉴욕 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직물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화가였던 부유한 유대인 가정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8 살 때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여 3년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여섯개의 언어를 할 수 있었고, 장래희망은 건축가 혹은 시인 혹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전공은 화학이었으나, 역사, 문학, 철학 등 문과과목도 공부를 해야했고, 졸업할 때 쯤에는 물리학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영국과 독일에서 물리학 박사학위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때가 1920년대였다. 원자탄의 존재 가능성은 꿈에도 꾸지 못했던 때다. 그러나 원자의 과학적 비밀은 알버트 아윈쉬타인, 로버트 러더포드, 막스 본 등에 의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때 만났던 유럽 과학자들은 나중에 오펜하이머를 이론물리학과 16세기 프랑스 시들을 탐독했던 독특한 미국인으로 기억하였다.


1927년 23세에 독일 괴팅겐 대학서 그당시에 원자세계를 이해하려는 첨단 과학이었던 양자물리학분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도교수는 막스 본이었다. 그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25세가 되던 해에, 버클리 대학과 캘리포니아공대 (칼텍)에 교수로 채용이 되었다. 1930년대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그의 동생 프랑크 오펜하이머와 동료 물리학자들 그리고 제자들을 뉴멕시코 주 페코스 삼림지대에 위치한 한 농장에 초대를 하여 여름방학을 보내곤 했다. 그당시에는 로버트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물리학, 문학, 철학, 그리고 말을 타고 나서는 며칠동안의 긴 산행이었다. 그때 대서양 건너 편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이 나치당의 지도자가 되어 결국엔 독일 수상이 되었다. 그때가 1933년 1월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박해 정책을 잇달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세계정세변화는 유대인 태생이었던 오펜하이머로 하여금 정치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였고, 무거운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고, 레닌의 저작들을 읽었다.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였다. 그때 사귀기 시작한 사람 중에는 버클리대학 불문과 교수였던 호칸 쉐바레가 있었고, 그의 첫 연인이었던 그당시 스탠포드대학 대학원생이었던 진 태트록이었다. 그 친구들은 좌익활동에 열성적이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니까,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좌익이었다. 그 자신은 미국 공산당에 직접 가입한 적은 없다. 그러나, 호칸 쉐발레와 진 태트록은 미국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그의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도 한동안 미국 공산당에 적을 두기도 했었다. 버클리에서의 좌익활동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열성적이었다. 그러한 활동때문에, 미국연방수사국 (FBI)는 1941년부터 오펜하이머를 감시 사찰하기 시작했고, 국가비상시에 감옥에 가두어야할 인물 리스트에 오펜하이머를 올렸다.이렇게 좌익사상을 가졌던 오펜하이머가 자본주의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가던 미국에서 원자탄을 만드는 정부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어떤 동기였을까. 아마, 이차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때문이 아니었을까. 독일 히틀러의 반유대인정책과 오펜하이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그 아이러니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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