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기우진 Aug 16. 2023

영화 <오펜하이머>, 원자탄 절대반지 3

트리니티(Trinity)의 성공은 왜 냉전의 시작이 되었나?

*표지사진: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어제 8월 15일에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강추한다.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는 맨하탄프로젝트에 대한 훌륭한 다큐 <The day after trinity (1981)>보다 원자탄을 둘러싼 정치, 군사, 외교적 이해관계를 매우 탁월하게 성찰하였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


영화 한 장면에서 에드워드 텔러가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에게 한 영국 친구가 '원자탄은 냉전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어떻게 그런 시각이 가능할까. 이 시각을 이해하는 단서는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 언급되는 날짜다. 트리니티의 날짜.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 장군 (맷 데이먼 분)이 암호명 트리니티라고 명명되었던 최초의 원자탄 폭발실험이 시행될 Jornada del Muerto 라는 분지에 가서 준비상황을 시찰하는 장면에서다. 두사람은 정확히 며칠날에 폭발실험을 할지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오펜하이머가 기술적 염려로 '9월?'이라 하자, 그로브가 '7월'이라 말한다. 오펜하이머가 다시 '8월?'이라 되묻자, 그로브가 '7월'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무슨일이 있어도 7월에 폭발실험을 해야한다는 게다. 왜? 왜 꼭 7월이었어야 했을까?


1945년 7월 16일 새벽 5시 29분. 원자탄이 처음으로 폭발된 시각이다. 포츠담 회담의 개시일은 7월 17일. 이 두 날짜는 우연이 아니다. 포츠담 회담은 소련의 스탈린, 영국의 처칠, 그리고 미국의 트루만이 독일 베를린의 교외 포츠담에서 만나 이차세계대전후 어떠한 세계질서를 수립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회담이었다. 트루만은 그 회담에 임할때 원자탄실험결과를 알고 싶었다. 그 회담에 임할때 자신이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가지고 있지 않은지를 알고 싶었다. 특히, 7월 17일 아침 자신이 스탈린을 만날때 그 사실을 알고 만나고 싶었다. 원자탄이라는 절대반지가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있는지를 말이다. 왜 그랬을까.


히틀러의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패망했다. 아시아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일본과의 전쟁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일본과 직접적으로 전선을 마주하고 있었던 연합국은 극동에서의 소련과 태평양에서의 미국이었다. 태평양에서의 일본과 미국의 싸움에서 이미 일본의 패색은 짙어만 갔다. 그당시 극동에서 소련과 일본은 싸우지 않고 있었다. 1941년 4월 13일에 일본과 소련이 맺은 불가침조약 때문이었다. 유럽과 태평양에서 각각 독일과 일본과의 두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미국은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기를 간절히 원하였고 그것을 루즈벨트대통령은 스탈린에게 호소하여 왔다. 루즈벨트가 생존하고 있던 1945년 2월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즈벨트에게 독일이 항복한 후 2-3개월 내에 일본과 극동에서 전쟁을 개시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히틀러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던 1945년 4월 5일,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파기한다. (이 사태로 일본정부는 발칵 뒤집히고 내각은 총사퇴한다. 일본정부가 소련과의 전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나타내는 반증이다. 일본정부는 태평양에서 미국과 극동에서 소련과의 두 전쟁을 동시에 벌일 능력이 전혀 없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소련군대는 유럽에서 극동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8월 8일에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서.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루즈벨트에게 한 약속대로, 독일이 항복한 날인 1945년 5월 7일 부터 정확히 3개월이 지난 날이다. 그런데 우발상황이 발생한다.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가 갑작스레 사망한다. 그리고 부통령이던 트루먼이 대통령이 된다. 트루먼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맨하탄프로젝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맨하탄프로젝트는 극비사항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원자탄개발에 대해 알게된 트루먼은 루즈벨트와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포츠담에 갈때 일본과의 전쟁을 어떻게 끝낼지 그리고 전후에 어떠한 세계질서를 세울지에 대한 두가지 안을 가지고 간다. 소련의 도움으로 일본과의 전쟁을 끝낼 것인지, 아니면 소련의 도움이 없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낼 것인지.. 어떤 길을 택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원자탄실험결과였다. 트리니티가 실패하면, 소련의 도움이 없이 일본과의 전쟁을 끝내기에는 미국의 희생이 너무 막대하였다. 그러나 트리니티가 성공을 하면 소련의 도움이 없이 일본을 쉽게 항복시킬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뿐아니라 미국이 원자탄을 독점하는 시간이 향후 대략 30여년이라고 오판을 하고 있던 트루먼은 전후의 세계질서를 미국이 혼자서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트리니티는 성공했고, 트루먼은 절대반지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절대반지의 위력을 소련의 참전전에 보여주어야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된 날은 8월 6일. 나가사키 투하는 8월 9일. 백만명의 소련 군인들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만주국의 경계를 넘어 파격지세로 진격한 날은 8월 8일이었다.


그렇게 맨하탄프로젝트의 성공은, 원자탄은 냉전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원자탄이 유일한 절대반지가 아니었다. 1949년에 소련이, 1952년에 영국이, 1960년에 프랑스가, 그리고 1960년대 중반에 중국과 이스라엘이 그 절대반지를 소유하게 된다. 알다싶이, 그후 다른 극소수 나라들도 그 대열에 합류한다.


만일,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가 성공하지 않았다면 세계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일본과의 전쟁에서 미국은 소련의 도움이 절실하게 되고. 그당시 중국에서 일본과의 전쟁 참여를 준비하고 있던 조선인 부대는 한반도에 연합군과 같이 진입하여 한반도를 일제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일제패망 후에 미국과 소련의 정치외교적 협력으로, 한반도의 분단은 고착화되지 않고 통일된 국가가 건설되고, 당연히 한국전쟁이라는 비극도 없지 않았을까... 원자탄이라는 대량살상무기경쟁으로 점철된 냉전보다는 루즈벨트가 꿈꾸었던 유엔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강대국들이 협력을 하게되는 전후 세계질서가 도래하지 않았을까.. 꿈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 (her)>, AI와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