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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예술 art

창비 여름호, 문진영 소설

마지막 여름의 마지막

by 요기남호

한국에서 돌아온 후에야 창비 여름호를 손에 들었다. 정기구독을 하니, 계간지는 나의 미국 주소로 배송이 되는 까닭이다. 한국 체류 기간동안 지난 수년 처럼, 마포구에서 지내며 창비에 거의 매일 출근을 했다면 그곳에 비치된 여름호를 읽을 기회가 있었겠지만.. 이번 여름엔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일상을 보내다보니 그럴 기회가 없었다.


창비 계간지를 받으면, 관심이 가는 논단 글이 있으면, 그걸 먼저 읽고, 그 다음은 소설들을 읽기 시작한다.


이번 호에는 백낙청선생님과 이남주교수의 대담 '2025년 체제,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먼저 읽었다. 강추한다. 백낙청tv에도 이미 나온 대담인데, 활자로 읽으니, 유투브를 들을때에 흘려지나갔었던 것 같은 문장들을 곱씹어 읽을 수 있어 좋았다. 1-2주 전 일이다.


오늘, 이 계간지를 들고 까페에 왔다. 얼마남지 않은 학기 시작 전에 좀 읽으려고.


소설의 목록을 훓어보다, 문진영 소설 '마지막 여름의 마지막'을 읽었다. 내 취향에 맞는 소설이다. 20대들의 고단한 사랑이야기. 여자주인공 여름은 연극배우이자 극작가다. 한편의 연극을 쓰고 올린 후, 후속작을 쓰지 못하고 있다. 남자주인공은 동양사상 전공 박사과정에 있다. 지방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의 인문학 대학원생 삶은 고단하다. 학자금대출도 있고, 전공과 무관한 아르바이트와 쥐꼬리만한 봉급이 나오는 강의 하나를 하고 있다. 고단한 일상때문에, 서로의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지를 못한다. 그 상황을 애잔하게 잘 묘사하였다. 그리고 제목 '마지막'이 주는 헤어짐이란 결말과는 약간 다르게, 희망에 문을 닫지 않은채로 소설은 끝이 난다. (아님, 제목에서처럼 결말은 이별이 작가의 의도인가..) 아뭏든, 소설의 끝이 명시적으로 이별이 아니어서, 긴 여운이 남는 소설이다. 강추한다. 이 작가의 작품들은 기회가 되면 찾아보아야겠다.


주인공들의 직업 때문인지, 소설을 읽으며 아주 옛날 추억 속 어느 한 저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석사학위 취득후, 짧은 군대를 마치고, 안암동 소재 모교 대학에서 강사로 일을 하며 유학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는 사귀는 사람도 없고 해서, 혼자서 연극을 보러 다니곤 했었다. 감동적인 연극을 본 후엔, 혼자서 혹은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그 연극을 보러 가기도 했었다. 그당시에 훌륭했던 극단은 연우무대였다. 다른 극단들은 번안극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었는데.. 연우무대는 창작극만 올리는 극단이었다. 창작극이니 당연히 한국상황에 대한 연극들이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한씨연대기'. 황석영의 동명 단편소설을 연극화한 것이었다. 그걸 처음 보았을때의 충격이란..


연극 '한씨연대기'에선, 한 젊은 여성이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이 있었다. 캄캄한 무대위에 한 젊은 여성이 서 있고, 유일한 조명이 그이의 머리에 쏟아지며 단아한 이목구비를 명암과 함께 들어낸다. 그리고 그 여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 인생에 관한 독백.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어서.. 군대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2명 혹은 3명..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군대 절친 3명 중에 한명은 이미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상태였던 듯 하기도 하고..) 데리고 그 연극을 보러 다시 갔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수년전에 우연히 한국드라마를 보다가 (수십년동안 한국문화는 거의 접하지 못했었다. 전공 연구에 바빠서.), 한 중년 조연여배우를 보았고, 그 배우가 먼 옛날 연극 한씨연대기에서 그 여성이었음을 알았다. ㅎㅎ 그후엔 그 배우가 많은 드라마에서 중년 어머니 역할로 나왔음을 알았고.. 국민 어머니인 김혜자 배우의 뒤를 잇는 듯한 배우. 다행이다. 훌륭한 배우가 되어주셔서.


그 옛날 저녁, 연극이 끝나고, 난 군대친구들과 대학로 거리로 나와 걷기 시작했고, 그 여배우는 다른 두 동료 남자배우들과 지척에서 걷기 시작했다. 두 남자배우들이 그 여배우를 놀렸는데.. 그당시 난 연우무대의 단골이어서 (같은 연극을 2-3번 보러 갔으니까.. 어느땐 관객이 거의 없었으니..). 그 연극을 수차례 보러 온 걸 알고는, 연극이 좋았던지 그 여성이 맘에 들었던지, (아님 둘다 이던지) 를 알아채고는 그걸로 그 여성을 놀리는 듯 했는데..


참, 먼 옛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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