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다림의 시간
결혼 후, 6년 동안 아이가 없었다. 남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했고, 나 또한 내가 하고 하는 일을 열심히 해오면서 아이보다는 각자의 일을 하느라 아이를 갖는 일에 남편은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여서 힘들고 어려웠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우울하고 힘든 날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기도하고, 일하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갔다.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우우라면 우울한 대로 그 시기를 지나야 했다. 그렇게 6년의 기다림 끝에 딸을 출산했다.
출산하기 1달 전. 병원 클리닉을 그만두려 할 때 원장님은 여러 번 만류하셨다. 하지만, 친정이나 시댁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를 내가 키워야 한다는 선택은 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소아 정신과에서 만난 아이들과 부모님을 통해 아이의 발달과 성장의 결정적인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론이 아닌 나의 임상현장에 서 직접 보고 온전히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2. 나보다 아이먼저
출산과 육아는 내 삶의 기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효율과 시간을 중시하던 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고, 걸음에 맞추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는 생존과도 같았고, 여유롭게 나를 돌아볼 틈은 없었다. 그 시간 후배가 육아 중에 올리는 요가와 필라테스 사진을 보는 게 화가 날 정도로 나는 독박육아 속에 온몸정신이 피폐했었다
나보다 아이 먼저였던 그 시기는, 나 먼저 오랫동안 살아왔던 나의 몸과 정신을 개조하는 시기였고 힘들었고 고통스러운 만큼,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조금은 그 개조의 고통(!)이 없었다면 현재 나의 성품이 여러 단계 업그레이드되기에는 어려움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3. 다시 사회로
육아, 살림, 파트 일들을 정신없이 하면서 하루하루 보냈다. 그러다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새로운 직장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48세의 나이. 새로운 직장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나의 낯선 직장생활보다는 아이들이 엄마가 없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정말 컸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 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에서 점점 나의 직장생활에 아이들은 생각보다 빨리 익숙하게 적응했다. 오히려 나보다 더 빨리 엄마가 없는 상황과 그 자리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환경에 길들여져 갔다.
4. 이제는 함께
아아 이들과 함께 살아온 지난 시간은 ‘나보다 아이 먼저’라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엄마의 품에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다시 사회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아이들은 그 자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적응해 나갔다.
처음에는 불안했다. 내가 직장에 나가 있는 동안 아이들이 혼자 견뎌야 할 시간들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고, 나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을 이끌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나란히 걸으며 서로에게 배우는 시간이 되었음을.
‘함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같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아이들의 성장 속에서 나도 성장했고, 내가 다시 사회 속에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아이들도 조금은 더 독립적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나보다 아이 먼저였던 지난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은 아이와 ‘함께’라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든든한 힘이 되어 주는 동행이다.
5. 남편과 더 함께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기다림의 시간도, 아이를 먼저 두었던 시간도, 다시 사회로 나아갔던 시간도 결국은 ‘함께’라는 결론을 향해 이어져 왔다는 것을. 이제는 아이와 함께를 넘어,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육아와 일, 그리고 나의 성장 과정 속에서 남편은 늘 곁에 있었지만, 때로는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아이를 먼저 두었던 시간에는 나의 선택이 중심이었고, 사회로 나아갔던 시간에는 나의 불안과 도전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과 나, 두 사람이 좀 더 함께 걸어가야 할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서 독립해 가는 지금, 우리의 삶은 다시 부부로서 서로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는 시점에 서 있다. ‘남편과 함께’라는 시간은 단순히 생활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지난 시간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길을 함께 설계하는 동행이다.
삶은 혼자서 걸어가는 길이다. 하지만, 함께 걸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결혼해서 남편과,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 이제는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남편과 함께. 결국 그 길 위에서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길을 준비하는 과정의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런 길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넓어지고, 조금 더 따뜻해지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새로운 길을 가기 전의 불안과 기대감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길은 어떤 길일까.
내가 동행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혼자서든.
함께든.
나는 그 길을 천천히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