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 노아는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현장을 둘러보았다. 노아는 특히 시체 윤곽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정민도 그 옆에서 같이 보긴 했지만, 많은 것을 알아낼 순 없었다. 기껏해야 도훈의 시신이 문쪽을 향해 쓰러져 있었다는 것 정도?
“문에 피가 묻어있네요.”
노아가 중얼거렸다. 정민은 고개를 들었다. 정말이었다. 철문에 검붉은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이건 어떻게 된 거지? 정민은 노아 쪽을 돌아보았다.
“강훈 형사님이 어제 피해자가 범인에게 제압된 채로 목이 졸렸다고 했거든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노아가 계속 중얼거렸다.
“자세한 묘사는 안 했죠. 그런데 현장상황으로 보건데, 범인이 피해자를 제압하는데 꽤 강한 폭력을 휘두른 것 같네요.”
“그럼 몸싸움이 있었던 걸까?”
“아뇨. 그랬던 것 같진 않아요. 강훈 형사님도 피해자가 반항한 흔적이 거의 없다고 했으니까.”
노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일방적으로 기습당한 거예요. 불시로요. 저 핏자국이 묻어있는 위치를 보세요. 거의 제 얼굴이 닿을 정도로 높아요. 피해자는 예기치 않게 이 철문에 얼굴을 들이박은 거예요.”
“범인에 의해?”
“예. 그것도 얼굴에서 저렇게 피가 다 튈 정도로 세게요. 당연히 머리에도 강한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정신을 잃었을지도 모르죠. 피해자는 키는 컸지만 그닥 건강한 체격은 아니었던 것 같으니…….”
정민은 해골마냥 빼빼말랐던 도훈의 모습이 다시 떠올라 살짝 몸서리를 쳤다. 노아는 말을 계속했다.
“피해자가 머리에 충격을 박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틈을 타 범인은 바로 목을 졸라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자, 그렇다면 문제는 살해방법보다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인데…….”
노아가 재차 말끝을 흐렸다. 아직 완벽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정민은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참았다. 노아의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또 본래 노아는 확신을 가지기 전까지는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는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기도 했다.
“역시 현장은 많은 것을 가르쳐주네요.”
이윽고 노아가 미소를 지었다.
“다만 제가 생각한 답들이 맞는지는 추가로 확인을 해봐야겠죠. 그만 갈까요, 선배?”
“그래.”
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노아가 이 현장을 보고 무엇을 추리해냈는지 몹시 궁금했지만, 일단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정민 역시 범인을 잡기 위해 열심히 추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민은 내심 뭔가를 더 유추해내기에는 현장의 단서가 너무 한정적이라고 생각했다. 범인이 실수로라도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고 갔으면 좋았을 테지만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경찰이 놓쳤을리도 없고.
“그럼 이대로 5층으로 가보죠.”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노아가 말했다.
“이번엔 그 부관장님 차례에요. 이름이 뭐였죠?”
“정우현.”
정민이 재빨리 대답했다. 사실 정민은 경찰이 뽑은 유력 용의자들 중에서도 우현을 가장 수상쩍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특별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직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우현의 알리바이가 증명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에 불과했다. 만약 그의 어린 딸이 변덕을 부리지 않았다면 우현이 도훈의 사망추정시간에 사무실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줄 사람이나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동기도 충분하지 않을까? 7월 단독전시회는 우현이 화랑관의 새 관장 자리에 오를 거란 사실을 처음으로 공표하는 자리였다. 그만큼 우현에게 중요하고 뜻깊은 자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훈이 그 전시회를 망치려 들려 했다. 화랑관과 관련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약점을 쥔채로…… 우현 입장에선 도훈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충분히 들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우현은 화랑관의 수많은 CCTV를 피해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사각지대, 옥상에 대한 출입이 가능했다고 하지 않은가. 범인이 유령이나 투명인간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 많은 CCTV를 피해 도훈을 살해한 후,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겠는가. 역시 옥상을 이용한 게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채로 정민은 노아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먼저 5층으로 갔다. 도서관 안쪽으로 잠시 들어가보긴 했지만, 구조만 대충 살폈을 뿐 자세히 조사하지는 않았다. 의외로 노아가 관심을 보인 것은 도서관 창문이었다. 도서관의 창문은 하단밀기창이었는데 제어장치가 걸려있어서 끝까지 열지 못하고 환기가 가능하도록 작은 틈 정도만 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구조였다. 흠. 노아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화랑관의 다른 창들도 이런 식일까요?”
“글쎄.”
정민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화랑관에 많이 와 본 정민이었지만 창문 구조에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까 관장님 사무실 창문도 이거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다른 곳도 다 그럴지는…….”
“그러네요. 한 번 확인해봐야겠어요.”
도서관을 나오면서 노아는 입구 안쪽에 설치된 CCTV를 잠시 살폈다. 일단 이 CCTV를 피해 도서관을 들락날락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도서관 조사를 마치고 나왔다.
노아와 정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번엔 서관 3층으로 갔다. 3층에 도착한 둘은 쭉 뻗은 복도 안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지점 쯤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전시공간으로 들어가자 한쪽에 화랑관의 명물인 브릿지 출입구가 보였다.
“피아니스트분과 친구가 이 브릿지를 건너 여기로 왔다고 했죠.”
노아가 뜬금없이 말했다. 정민도 잊고 있던 또 다른 용의자들, 서연과 우섭을 떠올렸다. 정민은 그 둘에 대해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범행이 불가능해보이는 건 둘째 치고, 둘은 피해자인 도훈과 접점이 너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이 도훈을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 전시관은 텅 비었네요.”
주위를 둘러보며 노아가 말했다.
“응. 전시가 진행 중이지 않으니까 비워놓은 것 같아.”
정민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서관 3층이 텅텅 비어있는 건 이 사건과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않고 노아는 계속해서 비어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CCTV는 있지만 다른 건 아무 것도 없네요. 아마 어젯밤에도 아무도 없었을 테죠. 사적인 얘기를 하기 좋았을 거예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이 공간을 가로질러 아마 복도쪽으로 갔겠죠. 3층 복도도 마찬가지예요. CCTV가 따로 없더라구요. 그리고 대충 이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여긴 볼 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거예요. 여자 쪽에서 아마 무료한 기색을 보였을 테고 남자 쪽에서는 다시 돌아가자고 했겠죠…….”
말을 마친 노아는 브릿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민인 잠자코 노아를 뒤따랐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서 브릿지를 통과해 동관 3층까지 이동했다. 브릿지의 통창을 통해 확 트인 화랑관의 주위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언제봐도 아름다운 그 광경에 (흐린 날씨 때문에 평소보다 어두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정민도 사건 때문에 긴장한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됐다. 노아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좋네요.”
브릿지를 다 통과한 노아가 입에 담은 감상이었다.
“어제도 와봤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밤에 봐도 예쁠 것 같은데.”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브릿지에 설치된 CCTV의 위치를 노아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을 정민은 놓치지 않았다. 브릿지에는 총 3개의 CCTV가 설치돼 있었다. 서관 3층과 동관 3층의 출입구에 하나씩 설치돼 있었고, 브릿지의 중간 부근에도 하나 설치돼 있었다. 브릿지를 이용하기 위해 평소 워낙 많은 관람객들이 몰리다보니 장난을 치거나 돌발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기에 설치한 것으로 정민은 알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커플은 여기서 동관 1층으로 다시 내려갔구요.”
엘리베이터 앞에 선 노아가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위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 부관장이란 분은 이대로 사무실로 올라가셨고.”
“다시 사무실쪽으로 가게?”
“일단 동관 5층으로 가죠. 하지만 사무실로 다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옥상으로 가요.”
정민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엘리베이터는 금방 도착했다. 두 사람은 다시 동관 5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밖에 나와 있는 직원은 없었기에 어색한 만남은 피할 수 있었다. 옥상으로 가는 입구는 엘리베이터의 오른쪽 끝에 있었다. 그곳에는 비상출입구가 하나 있었는데 노아가 문을 열자 위로 가는 계단이 하나 있었다. 계단 끝에는 활짝 문이 열려있었고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이었다. 경찰도 역시 옥상을 주목하고 조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노아와 정민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을 따로 지키고 있는 경찰관은 없었다. 멀끔한 화랑관의 겉면과 달리 옥상 바닥은 지저분했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것인지 먼지가 꽤 두텁게 깔려있어서 노아와 정민이 한걸음 한걸음 이동할 때마다 발자국이 찍혔다. 두사람 것 외에도 꽤 많은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는데, 아마도 경찰들의 발자국인듯했다. 여기저기 찍힌 크고 작은 발자국들을 살펴보며 노아가 말했다.
“만약 여기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면, 경찰은 바로 그 발자국의 주인을 특정하고 찾아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는 건…….”
“경찰들이 이 옥상문을 열었을 때 여기에는 발자국이 안 찍혀 있었다는 뜻이죠.”
노아가 미소지었다.
“이번 사건의 범인은 정말 유령 같네요. CCTV에도 찍히지 않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먼지 위를 걸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요, 선배?”
“무슨 트릭이 있는 게 아닐까?”
정민이 바로 되물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이 옥상에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 옥상을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가로지를 수 있는 방법 같은 게?”
“글쎄요.”
노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노아는 옥상의 가장자리를 보고 있었다. 정민도 노아의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확실히 옥상의 가장자리 위에 올라가 걷는다면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동관입구에서 서관입구까지 이동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옥상의 가장자리는 높고 좁은데다 가팔랐다. 웬만한 균형감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끝까지 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혹여라도 이 높이에서 떨어진다면…… 정민은 눈을 감았다. 십중팔구 죽겠지. 곡예사가 아닌 이상 이런 목숨을 건 묘기를 시도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나저나 날이 흐리네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아가 중얼거렸다. 정민도 눈을 뜨고 위를 보았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였다.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맞아.”
문득 어떤 사실이 떠오른 정민이 대답했다.
“사실 일기예보대로라면 원래 어제부터 비가 왔어야 해. 그런데 오늘 밤으로 미뤄졌더라. 아마 저녁부터 쏟아질 거야.”
“그래요?”
노아가 관심을 보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선배?”
“난 원래 일기예보를 미리 미리 확인하는 편이야. 요새는 어플리케이션으로 금방 확인 되잖아? 내가 쓰는 날씨앱을 보면 이번주 뿐 아니라 다음주 날씨까지 예보를 해주거든.”
“그럼 저번주부터 오늘 비예보가 있었던 거예요?”
“응. 어제,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까지. 한주 내내 비가 올 거라고 했어.”
“몰랐네요 전. 평소 날씨를 확인하는 편이 아니라.”
노아가 눈을 반짝이며 기묘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선배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이 비소식을 알고 있었을까요?”
“나처럼 미리미리 날씨를 확인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갑자기 노아가 날씨에 왜 꽂혔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정민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피식. 노아가 웃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웃음이었다.
“그렇군요.”
노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운이 좋았네요, 그 사람은.”
“......누구 얘기하는 거야?”
혹시 범인? 정민은 마저 묻지 않고 입에 담은 말을 삼켰다. 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민의 말을 못들은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대답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만 갈까요, 선배.”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노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화랑관의 사람들을 만나러요. 확인해봐야 할 것들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