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들 (9)

by 온실라

하윤에 대한 노아의 생각은 옳았다. 아무 기대 없이 이메일을 보낸 정민은 정훈과의 미팅이 끝나기도 전에 하윤으로부터 답신을 받았다. 노아를 만나겠다는 답변이었다. 그것도 오늘 당장. 정민은 내심 놀랐다. 세상만사 관심 없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하윤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답지 않게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윤은 오후 3시쯤이 좋다고 했다. 이를 정민에게 전해들은 노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제 안을 수락했다. 시간상 꽤 촉박한 편이었는데도 말이다. 정훈과의 미팅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게 다행일 정도였다. 노아와 정민은 급하게 차를 타고 하윤이 있는 곳까지 부지런히 달려야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하윤을 만나기로 한 장소에 30분 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훈과 마찬가지로 하윤도 약속장소로 카페를 선택했다. 그는 어느 작은 카페에서 노아와 정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진 골목에 위치한 카페는 일반 가정집을 개조한 것으로 요새 유행하는 젊은 감성이 묻어났다. 하지만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세 사람을 제외하면 손님이 아예 없었고 아르바이트생도 한 명 뿐이었다. 정민은 하윤 역시 사람들의 이목이 신경 쓰여 굳이 이 카페를 고른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취재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노아라고 합니다.”


“이하윤입니다.”


친밀한 미소를 날리며 정중하게 인사하는 노아와 대조적으로 하윤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 그는 노아는 물론이고 구면인 정민에게조차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정민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문화부 기자들 사이에서 하윤을 인터뷰 하기 어려운 화가로 악명 높았다. 일단 인터뷰 잡기도 어려웠지만, 겨우 자리를 마련해도 도무지 대화가 이어지질 않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자기 세계에 빠져 사는 천재의 표본. 정민은 하윤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노아라 할지라도 그런 하윤에게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정민은 문득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노아와 한 대화를 떠올렸다.


“범인과 화랑관의 약점이 연관됐을 수도 있다는 거, 정확히 무슨 뜻이야?”


정민의 물음에 노아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저도 확신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우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뿐이죠. 피해자가 화랑관을 협박하러 온 날 화랑관에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이요.”


대답과 함께 노아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때 정민은 노아가 조금 피곤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스도쿠 풀어본 적 있어요, 선배?”


“예전에 한 두 번?”


정민이 대답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제가 어떤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이 스도쿠 푸는 방식과 아주 비슷하거든요.”


노아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전 천재가 아니라 척보면 척하고 답이 나오지 않거든요. 그러니 일단 단서가 있어보이는 쪽을 물고 늘어지면서 집요하게 파볼 수밖에 없는 거죠. 김준호 관장이 숨기고 있는 화랑관의 약점. 외부인인 저희 작은아버지까지 참석한 피해자와의 수상한 미팅. 지금은 제게 주어진 단서가 그쪽 뿐이라서요. 아, 그리고 또 한 명.”


이하윤.


“이하윤 작가는 왜?”


정민이 되물었다.


“그가 유력한 용의자 중 하나라고 생각해? 하지만 경찰에 의하면 하윤 작가는 그날 계속 2층에만 있었다고 했잖아?”


“그가 범인인지, 혹은 유력한 용의자인지는 지금부터 만나서 확인해봐야겠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노아가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 통해서 들은 것뿐이지만…… 느낌이 오거든요. 이하윤 씨, 아마 저랑 같은 부류일 것 같다는 느낌이.”


같은 부류의 사람. 이하윤과 서노아가?


정민은 힐끗 노아와 하윤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노아는 세상 친밀하게 웃고 있었고, 하윤은 대리석 같은 무표정으로 그런 노아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외모는 물론이고 성격도, 닮은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언제나 뜻모를 소리를 하는 노아지만, 이번에는 정말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정민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아마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정민은 노아의 말에 흠칫 놀랐다. 노아의 어투는 평소처럼 부드러웠지만, 뭔가 박력이 있었다. 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어딘가 서두르는 듯한 느낌마저 주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이라니. 온갖 미사여구를 먼저 늘어놓아 자연스럽게 상대로 하여금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이 노아의 특기 아니었나.


“피해자인 강도훈 씨와는 평소 잘 아는 관계셨나요?”


“도훈 선배님. 잘 알았죠.”


역시 하윤은 만만치 않았다. 압박감이 느껴지는 노아의 말투에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느릿느릿, 자신의 페이스대로 답했다. 노아가 어떤 질문을 던져도 상관없다는 듯한 무심한 태도였다.


“같은 전시회에 작품을 낸 적도 몇 번 있었구요. 잘 알았습니다.”


“그렇군요. 사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나요?”


“사적으로는 딱히 없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피해자가 하윤 씨에게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


하윤은 느리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노아의 날카로운 질문이 그의 평정심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윤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도훈 선배님은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죠.”


“혹시 원한을 살만한 일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하윤이 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잠시 망설인 후, 말을 이었다.


“제가 선배님에게 무언가를 잘못한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선배님과 저는 추구하는 예술관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마찰이 있었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듣기로는 그것 뿐은 아닌 것 같던데.”


노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제가 듣기로는 하윤 씨가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기대받는 젊은 화가라고 들었습니다. 피해자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하윤 씨만큼은 아니었다구요. 게다가 하윤 씨는 미술계 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평소 피해자가 이런 하윤 씨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대놓고 시기질투하는 모습들을 보였다고 들었는데…….”


“.......”


하윤이 다시 한 번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잔물결은 이제 하윤의 마음 뿐 아니라 그의 고요하고 잘생긴 얼굴 위에도 퍼져가는 듯했다. 그나저나 워딩이 너무 센 거 아닌가? 노아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정민도 마찬가지였다. 하윤을 상대하는 노아는 정훈과 이야기를 나눌 때보다도 더 공격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피해자는 하윤 씨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


“피해자가 살해당한 저녁에도 화랑관 2층에서 피해자와 마주쳤다고 들었습니다. 안세민 씨가 아니었다면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던데…….”


“평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윤이 노아의 말을 잘랐다. 하윤은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정민은 그의 목소리 어딘가에서 감정적 동요가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도훈 선배님과 만나면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요. 도훈 선배님이 공격하고, 전 최대한 반응하지 않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로만 떠드는 것일 뿐, 몸싸움 수준으로까지 번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구요.”


“하지만 하윤 씨 입장에서는 그런 피해자를 상대하는 게 피곤하지 않았나요?”


노아가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물음이 아니었다. 하윤이 뭐라 말하기 전, 노아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피곤한 정도가 아니죠. 보통 사람 같았으면 짜증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올랐을 겁니다. 시기심으로 공공연히 나를 적대하는 업계 선배……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하윤 씨의 단독전시회까지 훼방을 놓으려고 했죠?”


“.......”


하윤이 흠칫했다. 노아가 7월 특별 전시회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줄은 예상 못한 모양이었다. 노아가 말을 계속했다.


“화랑관에게 매우 중요한 이벤트라고 들었습니다. 하윤 씨에게도 커리어적으로 꽤나 중요한 전시회였겠지요. 게다가 하윤 씨는 프라이드 높은 아티스트 아닙니까? 그런데 안 그래도 사이가 안 좋은 피해자가 이것까지 망치려드니…… 하윤 씨 입장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를 만한 상황 아닌가요?”


노아가 에둘러 표현하고 있긴 했지만, 사실상 대놓고 도훈을 살해할만한 동기가 있는 거 아니냐고 묻는 겪이었다. 하윤의 하얀 얼굴이 한층 더 창백하게 변했다.


“이건 모르셨나보군요, 기자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유지한 채 하윤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7월 전시회는 제 단독 전시회로 예정돼 있었고, 도훈 선배님이 갑자기 끼어든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전 이때문에 도훈 선배님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양보했지요. 이미 화랑관에게도 알렸습니다. 7월 전시회를 도훈 선배님과 함께 하겠다고 말입니다.”


“아니요. 알고 있었습니다, 하윤 씨.”


노아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사실 이건 화랑관 관계자 중 누구에게도 전해들은 바 없는 부분이었지만, 하윤의 고백은 노아가 이미 세워놨던 가설에 대한 확증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하윤 씨가 피해자가 절대 받아들일리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화랑관 2층 전부는 하윤 씨가 사용하고, 피해자는 서관 1층에만 작품을 전시하는 조건을 내걸지 않았습니까?”


“......!”


이번에야말로 하윤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설마 화랑관이 그런 부분까지 노아에게 말해줬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모양이었다. 하윤 입장에서는 설마 노아가 그날 자신이 2층만 계속 왔다 갔다 했던 행동을 근거로 여기까지 추리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할 터였으니 화랑관이 모든 걸 다 노아에게 털어놓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민은 새삼 하윤을 다시 보았다. 노아의 추리가 적중했다는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노아의 추리가 맞다면, 하윤은 나르시스트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란 소리였다. 그건 놀라웠다.


“당신은 아마 피해자에게 망신을 주고 싶었던 거겠죠.”


노아가 쉼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요? 7월 전시회에 온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두 작가의 공동 전시회. 그런데 한 명은 2층 전부를 쓰고, 다른 하나는 서관 1층만 쓴다. 누가봐도 비교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단독전시회를 망치려는 피해자에게 그런 식으로 보복하려고 했던 게 아닙니까, 하윤 씨?”


“아닙니다!”


“그리고 그날 미팅에서 피해자는 이 조건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더한 억지를 부렸겠죠. 당신은 미팅이 끝나는대로 그 내용을 전해들었을 거구요. 이에 당신은 몹시 분노했죠. 그런데 마침 피해자가 서관 1층으로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당신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CCTV의 사각지대를 활용해 피해자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아닙니다!”


하윤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언성을 높였다. 그는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기세였다. 정민은 물론 멀리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아르바이트생도 깜짝 놀라 하윤 쪽을 바라보았다. 반면 노아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했다. 침착한 정도가 아니라 하윤을 놀리듯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정민의 눈에는 미소가 아니라 비웃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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