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들 (10)

by 온실라

“기자님이 하는 말은 전부 억측에 불가합니다.”


뒤늦게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은 하윤이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정민이 보기에는 평소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보이던 하윤의 모습과 이미 꽤나 거리가 있었다.


“그제 미팅의 내용은 저도 전해들은 바가 전혀 없습니다. 제가 이와 관련해 화랑관에 연락한 적도 없구요. 전 애초에 그날 밤 도훈 선배가 화랑관에 온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그런 제가 언제 선배가 미팅을 끝냈는지, 미팅 후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무슨 수로 선배의 동선을 알고 찾아갈 수 있었다는 겁니까? 참고로 전 선배와 개인 연락처조차 주고 받지 않은 사이입니다.”


하윤의 입에서 온갖 설명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며 정민은 하마터면 감탄사를 뱉을 뻔했다. 하윤이 저렇게 빨리, 그리고 많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아는 미술계 인사가 몇이나 될까? 그렇지만 동시에 정민은 하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윤과 도훈이 미리 약속이라도 잡지 않은 이상 하윤이 미팅 후 도훈의 위치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해보였다.


“하윤 씨가 몰랐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노아가 능글맞게 말을 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제야 조금 깨달으신 것 같군요. 그렇다면 말이 나온 김에 제 간단한 가설을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혹시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피해자의 시신은 서관 1층, 비상계단 문 안쪽에서 발견됐습니다. 범인의 모습은 CCTV에 전혀 찍히지 않았구요. 굳이 제가 강조하지 않아도, 화랑관에서 이게 불가능한 일임을 하윤 씨도 잘 아실 겁니다.”


“.......”


생각보다 크게 놀라지 않는 하윤의 반응으로 볼 때, 하윤도 누구에게선가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그와 관련해 깊게 생각해본 눈치는 아니었지만.


“수사를 하다보면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중 불가능한 가능성들은 완전히 배제하고, 믿기 어렵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가능성들만 남기게 돼죠. CCTV에 범인이 찍히지 않았다. 가장 먼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외부인이 범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날밤, 화랑관 내에 있던 사람들 중 범인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피해자가 서관 1층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동관에 있던 사람들도 범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CCTV에 찍히지 않고 동관에서 서관으로 이동하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


하윤은 묵묵히 노아의 말을 들었다. 아직 노아가 어느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노아의 다음말에는 바로 발끈하고 반응했다.


“따라서 용의자는 그날 서관에 접근했거나, 접근 가능했던 사람들 중에 추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윤 씨. 하윤 씨는 피해자의 사망추정시간 동안 2층의 서관, 중앙관, 동관을 계속 오간 사람입니다. 그것도 혼자서요. 다른 참석자들은 이미 진작에 전시작품들을 다 둘러본 후였기 때문에 하윤 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죠.”


“그건……!”


경악한 하윤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살인용의자로 의심받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전 서관 1층에 간 적이 없어요! 제 모습은 CCTV에 찍혔을 것 아닙니까! CCTV를 보면……!”


“물론 하윤 씨의 모습은 2층 CCTV에 여럿 찍혔습니다. 다만 제가 오늘 화랑관을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노아가 하윤의 말을 잘랐다.


“서관의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이 위치한 복도. 거기는 CCTV가 따로 설치돼 있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작품이 전시된 공간 위주로 CCTV를 배치하다보니 사각지대가 생긴 거겠지요. 하윤 씨도 아마 이 복도를 거닐었겠죠?”


“서관 안쪽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려면…….”


핏기가 가신 얼굴로 하윤이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그 복도를 통과한 모양이다. 그 순간만큼은 CCTV에서 하윤의 모습도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오래 있지 않았어요! 어디까지나 서관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과한 것 뿐이니…….”


“오래 있을 필요도 없지요.”


노아가 받아쳤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봅시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하윤 씨는 그때 사실 2층에 계속 머물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원하는 건 이미 다 본 상황이라 슬슬 1층으로 내려가려고 했지요. 그러다 마침 2층 엘리베이터와 비상계단 입구 앞에 멈춰선거지요. 하윤 씨는 운동이라도 할 생각으로 계단으로 내려가기로 합니다. 문을 열고 내려가고 있는데 하필 1층에서 피해자와 마주친 겁니다.”


“잠깐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윤이 노아의 말을 멈추려 했지만, 노아는 신경 쓰지 않고 목소리 톤까지 살짝 높여가며 계속했다.


“피해자는 분명 또 하윤 씨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겠죠. 아마 7월 전시회에 관련해서였겠죠? 피해자가 전시회를 망칠 작정을 한 것을 새삼 깨달은 하윤 씨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구요. 그런데 피해자가 그 순간 하윤 씨에게 등을 보인 겁니다. 하윤 씨는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를 공격했고, 어렵지 않게 그를 제압할 수 있었죠. 문제는 제압에 그치지 않고, 그간 쌓아온 분노를 통제 못한 나머지 피해자를 죽이고 만 겁니다.”


“이봐요!”


결국 참지 못한 하윤이 벌떡 일어났다. 한가로이 휴대폰에 열중하고 있던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놀란 얼굴로 일어난 하윤을 바라보았다. 정민은 재빨리 하윤에게 듣는 사람이 있음을 눈짓으로 알렸다. 바로 알아들은 것인지 하윤은 아차 하는 얼굴을 하더니 황급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노아는 웃고 있었다.


“우발적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후였죠. 당황한 하윤 씨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다시 2층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2층 CCTV에 홀로 전시된 작품들을 관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찍혔을 테니, 마치 2층을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기로 하죠. 운이 좋게도 피해자를 살해하는데 시간이 얼마 지체되지 않았으니까요. 목격자도 전혀 없었구요. 하윤 씨는 다시 2층으로 뛰어올라갑니다. 그리고 다시 그림들을 관람하는 척 하면서 계속 2층을 오가는 거죠. 파티가 끝날 때까지 말입니다. 살인 직후 정신없는 감정과 생각을 추스를 필요도 있었고, 또 2층에 오래 머물 수록 알리바이에 유력하다고 판단한거겠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윤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었는데,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한편 노아의 추리를 들은 정민은 혼란에 빠졌다. 노아의 추리대로라면 사건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느낌이었다. 다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디테일들을 노아가 설명하지 않고 대충 넘겨버린 것 같았다.


“전 그저 가설을 들려드린 것뿐입니다, 하윤 씨.”


노아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도 하윤 씨의 말에 동의합니다. 말이 되지 않지요. 제가 만들어낸 가설이지만, 꽤 여기저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아의 말에 하윤이 반색했다. 죽다 살아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뒤이은 노아의 말에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수사기관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경찰 말입니까?”


“예. 말씀드린 것처럼 범인은 교묘한 수로 CCTV를 피해갔습니다. 그렇다면 경찰은 그나마 범죄가 가능한 사람들 중에서 용의자를 골라 집중수사할 수밖에 없겠죠. 운이 나쁘게도 하윤 씨는 그런 사람 중 하나입니다. 심지어 동기까지 있죠.”


“동기라뇨?”


하윤이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도훈 선배가 절 적대한 건 사실이지만 전 도훈 선배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도훈 선배는 저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지만 전 단 한 번도 잘못 대처한 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해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하윤은 정민 쪽을 쳐다보았다. 도와달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정민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보였다.


“그건 하윤 작가님 말이 맞아. 시비는 언제나 도훈 작가가 일방적으로 거는 거였으니까.”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 건에 관해선 전 피해자입니다.”


“말했잖습니까. 그건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평소 울분이 쌓여있던 하윤 씨가 순간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으로 얼마든지 해석가능합니다. 정보를 하나 드리자면…….”


노아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무거운 투로 속삭였다.


“경찰이 현재 용의선상에 올려놓은 사람들 중 피해자에게 가장 큰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은 하윤 씨입니다.”


“......!”


“범행이 가장 가능해보이는 사람도 하윤 씨구요. 무엇보다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2층에 혼자 있었으니까요. 맘만 먹으면 서관 1층에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는 위치였다는 거죠.”


“.......”


하윤이 노아를 돌아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형편없게 일그러진 탓에 갑자기 확 늙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것이라고 정민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제게 이런 말들을 해주시는 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하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자님은 제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전 가능성이 낮다고 봅니다.”


노아가 대답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문제가 아니죠.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건 이겁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가능성들을 제외한다면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해도 그나마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머지 않아 경찰 쪽에서도 저와 비슷한 가설을 떠올릴 겁니다. 그리고 하윤 씨를 수사하다보면 모든 게 다 맞아떨어지진 않겠죠. 그렇지만 그나마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해서 계속 파고들 겁니다.”


“.......”


“안타까운 일이죠.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경찰이라고 항상 다 맞진 않습니다. 엉뚱한 사람이 용의자로 몰려 법정에 서는 케이스는 의외로 흔합니다.”


“......저보고 뭘 어쩌라는 겁니까.”


하윤이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싶지 않으면 범인을 잡는데 협력하라는 겁니까?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도 아는 게 없어요. “


“사건에 관해서 아는 게 없으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노아가 부드럽게 말했다. 강하게 압박하던 어조가 어느새 아이를 살살 달래는 것처럼 변해있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얘기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요? 피해자에 관해서라던지. 피해자와 화랑관의 미팅에 관해서라던지.”


“도훈 선배에 관해…….”


하윤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마침내 다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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