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골제국과 양자강
병자궤도(兵者詭道)
후퇴만 하던 몽골군이 거꾸로 싸움을 걸어왔다.
거짓 후퇴로 적을 유인한 다음 미리 점찍어둔 장소에서 공격하는 바로 그 방식이었다. 후퇴는 사냥꾼이 사냥감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기 위한 유인전술이었다. 몽골군에겐 연습을 통해 익숙해진 사냥방식이었다.
헝가리군은 궤멸 당했다. 사망자 수는 무려 7만에 이르렀다. 벨라 4세는 지중해의 한 섬으로 달아났다. 교만이 가져다 준 참담한 몰락이었다. 속임수는 유목민들의 가장 흔한 전술이었다.
손자의 정의에 의하면 ‘전쟁은 상대를 속이는 행위(兵者詭道)’ 이다. 궤(詭)는 속임수를 말한다. 그가 쓴 손자병법은 지금도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의 교범으로 사용된다.
헝가리의 아름다운 도시 부다와 페스트가 몽골군에 의해 짓밟혔다. 몽골군은 벨라 4세를 집요하게 뒤쫓았다.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군의 진격을 막아낼 유럽의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몽골군의 말은 오스트리아 빈의 교외까지 이르렀다. 빈이 무너지면 독일과 프랑스까지 위험했다. 유럽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모든 성당에는 기도소리가 넘쳐 났다. 서유럽이 몰락하기 일보직전. 아득히 멀리서 날아온 소식 하나가 그들을 구해냈다.
‘병자궤도’ 전술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한 장수는 칭기즈칸이었다. 그는 몽골제국의 창업주다. 칭기즈칸이 없었더라면 몽골제국도 없었다. 그의 제국은 창업주의 뒤를 이은 3대 계승자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몽골은 초원의 나라에서 바다의 제국으로 확대됐다.
초원이 바다로 바뀌는 중간 과정에 양자강이 존재한다. 장장 6300㎞를 흐르는 장강(長江)이다. 몽골군의 유럽 원정 맞먹는 거리다. 물은 흘러가는 동안 사람과 마을, 도시와 역사를 만들어 냈다.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러와 적벽에서 조조를 이긴 곳도 양자강이다. 수만리 장강은 청두, 충칭, 난징, 상하이 등 도시를 품고 있다. 쿠빌라이가 강을 건넌 곳은 우한(武漢) 지역이었다.
칭기즈칸은 몽골 고원에서 발원했다. 그의 손자 쿠빌라이는 육상과 해상을 묶는 실크로드를 완성시켰다. 쿠빌라이의 원(元)은 만주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그의 치세 동안 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항로에는 어떤 나라의 배도 자유로운 항해가 보장됐다.
그의 제국에선 아랍계 무슬림이 제국의 재정을 담당했고, 한인(漢人)들이 행정을 이끌었다. 1억 2천 만 명 중국인들은 어느 때보다도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누렸다. 유교와 불교는 물론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한 도시에서 이웃해 살았다. 몽골의 연극은 그리스와 비견됐다.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도 공공연히 상연됐다.
팍스몽골리아다. 팍스로마나 이후 처음 찾아온 평화의 시기였다. 활기에 넘친 제국은 유럽인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비춰졌다. 관용은 제국의 구속구석까지 퍼져있던 미세혈관을 자극했다.
그러나 한족의 나라 명(明)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몽골 기병을 다시 북쪽 고원으로 내쫓은 명은 유례없는 쇄국 정책을 펼쳤다. 이로써 동양의 바다 길은 막혔고, 그 바다를 차지한 서양이 마침내 동양을 앞지르게 됐다.
서유럽이 몽골의 속국이 됐더라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위기의 유럽을 구한 것은 칭기즈칸의 아들 우구데이 칸의 사망 소식이었다. 몽골군에게 즉시 귀환명령이 떨어졌다. 유럽을 삼키려던 태풍은 멈춰 섰다.
이때부터 몽골제국에는 격동의 역사 드라마가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