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골제국과 양자강
몽골식 결혼식
소년은 성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덟 살 첫 만남이후 10년 가까이 지났다.
두 사람은 친지들의 축복 속에 혼례를 치렀다. 몽골식 결혼의 하이라이트는 친구들의 방해를 뚫고 신부가 숨은 텐트를 찾아가는 의식이다. 그녀에게서 우구데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로 이어지는 몽골 황제의 혈통이 나왔다.
몽골족은 모두 합쳐 100만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은 양자강을 중심으로 북쪽의 금(金)과 남쪽의 송(宋)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각각 5천 만의 인구를 가진 대국들이었다.
금은 몽골을 머리에 이고 지냈다. 골칫거리였다. 대국은 어떻게 유목민 부족들을 다루었을까. 가장 쉬운 방식은 몽골족의 분열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약소국 지배 원칙. 디바이드 앤드 룰(DEVIDE AND RULE)이었다.
분열될수록 다루기에 편하다. 단합된 몽골족은 골칫거리였다. 한 부족의 힘이 세어지면 다른 부족을 부추겨서 견제했다. 금은 약소국을 다루는 자신들의 방식을 ‘감정(減丁) 정책’이라 불렀다.
쉽게 설명하면 으르고 달래기였다. 금 세종은 3년에 한 번 꼴로 대규모 군대를 보내 몽골을 짓밟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거나 포로로 데려왔다. 저항의 싹을 허용하지 않았다. 테무친의 친척도 ‘감정 정책’으로 희생됐다.
‘감정정책’은 꽤 효과적이었다. 혼을 내준 대음엔 조금씩 당근을 주어 길들였다. 맞서 싸우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금은 몽골족을 여러 부족 국가로 나누어 지내도록 뒤에서 조정했다. 그들 중 메르키트 족은 제법 큰 세력이었다. 그들은 테무친을 눈에 가시로 여겼다. 그들과는 테무친의 아버지 때부터의 해묵은 원한이 있었다.
메르키트 족에게 테무친의 성장은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싹을 잘라 놓아야 했다. 메르키트 족은 테무친을 밟아버리기로 작정했다. 어둠을 틈타 테무친 부족을 급습했다. 전혀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테무친은 재빨리 달아났다. 부인 부르테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 기습을 당했을 때 남자들부터 달아나는 것은 몽골족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부르테를 두고 가면 추격자들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정주사회라면 이를 치욕으로 여겼을 것이다. 정주사회에선 때로 체면이나 명분이 목숨과도 맞바꿀 만큼 무게를 지녔다. 뻔히 아는 이웃끼리 체면(體面)이 손상되면 차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노릇이다.
유학은 더욱 체면을 중시했다. 조나라 성안군의 예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신의 20만 대군이 조나라를 치려하자 곧 위태로워졌다. 성안군은 신하들을 모았다. 그 가운데 용감한 장수 이좌거가 있었다.
이좌거는 “적군이 비록 수에서 앞서지만 천리 길을 행군해오느라 지쳐있습니다. 저에게 3만의 병력을 주면 험한 지형에 매복해 있다가 적을 물리치겠습니다”고 호언했다.
충직한 신하였다. 그런데 성안군은 엉뚱한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