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골제국과 양자강
칸 중의 칸
국경 수비대 장수는 전설의 ‘프레스터 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수상한 늙은이 한 명을 살해했을 뿐이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의 아들은 도망자로 전락하여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결국 위구르인들에게 피살됐다.
대 케레이트 제국이 테무친의 수중에 떨어졌다. 테무친은 제국의 소르칵타니 공주와 막내아들 톨루이를 혼인시켰다. 그들 사이에서 쿠빌라이가 태어났다. ‘세계의 정복자’ 대를 이을 ‘세계의 경영자’의 탄생이었다.
쿠빌라이는 그의 할아버지가 금나라를 정복한 1215년에 태어났다. 손자의 얼굴을 처음 본 칭기즈칸은 “이놈 봐라. 꼭 중국인처럼 생겼네”라고 웃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몽골 고원에 남은 적은 나이만뿐이었다. 그곳에는 자무카가 도망자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1204년 봄 쿠릴타이(몽골의 최대 의사 결정 회의)가 소집됐다. 나이만과의 전쟁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장군들은 봄에는 말이 야위어 있으니 가을까지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몽골 고원의 겨울은 말에게도 혹독한 계절이다. 동생인 테무게와 노얀은 전쟁개시를 주장했다. 테무친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첫 전투는 카라코룸(몽골 고원의 중심부에 위치한 옛 몽골의 수도) 근처에서 벌어졌다. 테무친은 세계전쟁사에 남은 기발한 작전을 선보였다. 병력을 여러 겹으로 길게 늘어서게 했다. 앞줄이 화살을 쏘고 뒤로 빠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왔다. 그를 본 나이만 군도 병력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러자 테무친은 재빨리 병력 배치를 바꿨다. 앞을 뾰족하게 한 고깔모양으로 전환시켰다. 나이만 군 대형의 약점을 찾아 송곳처럼 찔러 들어갔다. 훗날 나폴레옹도 이런 전술을 즐겨 썼다. 병력을 한 군데 집중시켜 적의 약한 곳을 찾아 먼저 부수었다.
유럽 여러 나라와의 전쟁에서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안겨준 ‘속도전’도 몽골군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행군 속도는 늘 예상을 뛰어 넘었다. 병참 부대를 최소화한 것도 몽골 방식이었다.
나이만 왕은 전사했다. 자무카는 또 달아났다. 끈질긴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자무카는 산적으로 전락했다. 얼마 후 그의 부하들은 자무카를 산채로 묶어 테무친에게 데려왔다. 테무친은 자무카를 배신한 부하들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테무친은 자무카에게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했다. 자무카는 “세상이 이미 그대 것인데 나는 짐만 될 뿐이다”며 거절했다. 몽골의 왕자답게 피 흘리지 않은 채 최후를 맞게 해주었다. 테무친은 안다의 증표로 주고받은 허리띠를 채워 그를 장사지냈다.
이제 알타이 산맥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땅이 모두 테무친의 것이 됐다. 테무친은 1206년 봄 성산(聖山) 부르칸 칼둔 근처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했다. 아내를 빼앗긴 곳도, 적들을 피해 달아났던 곳도 모두 부르칸 칼둔 산이었다.
몽골과 투르크 계 유목민 대표가 모두 모였다. 그는 칭기즈칸(Chinggiz Khan)으로 추대됐다. ‘칸 중의 칸’이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