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골제국과 양자강
손자의 죽음
호라즘 샤에 참전한 칭기즈칸의 군사 수는 10만에서 15만 사이로 알려졌다. 무함마드의 군사 수는 40만을 헤아렸다.
수적으로 앞선 무함마드는 유감스럽게도 전술 면에서 무능했다. 무함마드는 수비 위주 전략을 펼쳤다. 지구전으로 몽골군을 지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몽골군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왔다.
몽골군은 원정에 특화된 군대였다. 그들은 1인당 네 마리의 말을 몰고 다녔고, 병참부대를 따로 두지 않는 독특한 자급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외교에 이은 두 번째 실수였다. 더구나 무함마드는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사이가 나빴다.
무함마드와 칼리프는 중동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무함마드의 비극은 곧 칼리프에겐 즐거움이었다. 무함마드가 사라지면 중동은 오로지 칼리프의 세상이었다. 이 또한 착각으로 드러났지만.
바그다드 역시 나중에 칭기즈칸의 손자에 의해 철저히 유린됐다. 역사는 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원리를 가르친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려지는 법이다. 하지만 권력에 취하면 금세 교훈을 잊고 만다.
몽골군은 어느 때보다 잔인했다. 몽골군은 공포라는 심리적 압박감을 최대한 이용했다. 전투에 앞서 상대에게 공포를 느끼도록 전략적 압박을 가했다. 공포전술은 나중에 유럽원정에서도 유용하게 활용됐다. 유럽인들은 몰려드는 피난민들이 전하는 몽골군의 과장된 악행 소문으로 인해 싸우기 전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손자의 전사 소식은 칭기즈칸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칭기즈칸이 가장 아끼던 손자였다. 그가 전사한 바미얀에선 단 한 명의 포로도 허용되지 않았다. 모든 생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이슬람 역사가 이븐 알 아씨르는 “전능하신 신이 아담을 창조한 이래 최대의 재앙이자 가장 무서운 재난이었다”고 전했다. 칭기즈칸 연구가 잭 웨더포드에 따르면 몽골의 중앙아시아 침략 당시 사망자 수는 1500만 명에 달했다.
수도 사마르칸트는 5일 만에 함락됐다. 주민의 다수는 살해됐고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다. 이슬람 장인들은 포로가 되어 몽골 고원으로 끌려갔다. 동부 이란의 도시 발흐에는 지금도 당시의 파괴 흔적이 남아 있다. 무함마드는 몽골군을 피해 달아나다 카스피해 어느 섬에서 외롭게 죽었다.
그의 죽음은 뜻하지 않는 유산을 인류에게 남겼다. 그를 추격하던 제베과 수보타이는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 유럽이었다. 몽골군은 우연히 기독교 왕국 조지아의 영토에 들어섰다.
몽골과 유럽의 역사적 첫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