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36)

1. 몽골제국과 양자강

by van

치밀한 계산


역사가들은 1259년을 주목한다. 어쩌면 세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한 해였다. 오늘 날 흔히 말하는 ‘세계화’의 첫 걸음이 시작된 해다. 몽골 제국의 새 칸으로 선출된 뭉케는 남송과 중동 원정에 착수했다.


몽골의 세계 정복 퍼즐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두 개의 빈 칸이었다. 남송정복은 그의 조부 칭기즈칸의 유언이기도 했다. 뭉케는 동생 훌레구를 중동으로 보냈다. 그는 아버지 톨루이를 닮은 전사였다.


남송 정벌에는 자신이 직접 나섰다. 초반에는 쿠빌라이를 남송 원정서 배제했다.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하는 쿠빌라이의 배제 이유는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중국화 되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쿠빌라이에게 주어진 영지는 북중국이었다. 황하를 끼고 있는 이곳은 중국 문명의 발상지다. 쿠빌라이는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선 몽골의 초원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 방식을 배워서 중국을 통치하려 했다. 이는 몽골 방식에 대한 배반으로 비춰졌다.


어느 문화권이건 자신들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온 세계가 몽골의 손 안에 든 시기였다. 유목 방식에 대한 몽골 지도부의 자부심은 단단했다.


쿠빌라이는 조금 달랐다. 그는 약탈을 포기하는 대신 경영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약탈은 일회용으로 그치지만 경영은 영구적인 재화의 공급을 보장했다. 나중에 영국이 식민지에 적용한 방식이다. 그러나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은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쿠빌라이의 방식은 근대화된 모델이었다. 한꺼번에 몽땅 수탈해 버리면 미래의 먹거리가 사라진다. 식민지 농민에게 식량을 나눠줘야 영구 수탈이 가능하다. 거위의 배를 가르면 더 이상 알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쿠빌라이는 중국 농민들의 세율을 오히려 낮추어 주었다. 생산성이 높아져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둔전을 설치하여 군인들이 영내에서 자급자족하게 만들었다. 성(城)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고 그들이 성안에서 살아가도록 보호해 주었다.


몽골 본토의 보수적 세력은 쿠빌라이의 방식에 불만을 가졌다. 그들의 속삭임은 두 형제 뭉케와 쿠빌라이의 사이를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뭉케는 쿠빌라이 영지에 대한 대규모 세무조사를 명했다. 속속 위반 사항이 드러났다. 탈탈 터는데 먼지가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쿠빌라이의 수족들은 뭉텅뭉텅 잘려나갔다. 주요 참모들이 관리직에서 쫓겨났다. 극형에 처해진 관료도 있었다. 쿠빌라이의 권한은 축소됐다. 성급한 참모들은 본토와의 전쟁을 입에 담았다. 쿠빌라이 역시 분노했다.


그러나 중국인 참모 요추가 적극 주군을 만류했다. ‘꾀주머니’로 불리던 자였다. 전쟁은 반란을 의미한다. 명분을 상실하게 된다. 유목민들에겐 낯선 단어다. 유목민은 오로지 실익만 쫓았다. 그러나 정주민들은 실체도 없는 명문에 목숨을 걸었다.


현재의 군사력으론 필패지세다. 이기기도 힘들겠지만 이겨도 불안정하다. 러시아 초원의 바투는 물론 중동의 훌레구, 중앙아시아의 차가다이 등 주변 세력들이 반란이라는 참전 명분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