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37)

1. 몽골제국과 양자강

by van

아, 양자강 1


요추는 ‘형제애’에 주목했다. 그는 전쟁 대신 칸끼리의 대화를 제안했다. 직접 칸을 찾아가 담판을 지으라는 조언이었다. 그들 사이는 어쨌든 형제였다. 피가 물보다 진한 점을 이용하라. 쿠빌라이는 형을 찾아가 머리를 숙였다.


뭉케는 동생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일촉즉발의 위기국면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겉으로 평화를 되찾았지만 내면은 여전히 끓고 있었다. 뭉케가 남송 원정 초기 쿠빌라이를 배제시킨 이유다. 하지만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은 이내 쿠빌라이를 소환시켰다.


쿠빌라이는 남송과 유사한 기후의 대리(중국 윈난성 서부) 원정에서 성공을 거두어 주목을 받았다. 누가 뭐래도 몽골 내에서는 최고의 중국 전문가였다. 쿠빌라이는 대리 경영에도 중국 방식을 도입했다.


쿠빌라이는 먼저 대리 왕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왕국의 실권자 고태상이 이를 거부했다. 그는 왕국의 안위보다 자신의 권력을 먼저 생각했다. 몽골 치세가 되면 권력을 잃을 게 뻔했다.


고태상은 금사강(金沙江)에 병력을 집결시켜 두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깊은 강심(江心)과 빠른 물살에 의지하기 위해서였다. 몽골군은 물을 두려워한다고 들었다. 쿠빌라이는 양가죽 뗏목을 만들어 한 밤중에 강을 건넜다. 허를 찌르는 전격 작전이었다. 대리군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대리의 수도를 정복한 후 약탈을 최소화했다. 할아버지 칭기즈칸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쿠빌라이는 대리, 섬서, 하남을 다스리기 위해 위구르인 염희헌을 선무사로 보냈다.


염희언의 첫 조치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주민들 위에 군림해온 역술인부터 처단했다. 주민들의 숭배대상이 되어 온 자였다. 그가 처단했는데도 아무 일 없자 민심이 확 돌아섰다. 유학에 능해 염맹자(廉孟子)라고 불린 그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쿠빌라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구분했다.


대리에서의 성공을 치하한 칸은 보상으로 남경과 서안(西安) 가운데 하나를 영지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서안은 한(漢)과 수(隨), 당(唐)의 수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지만 당시 남경보단 인구가 적었다. 당연히 쿠빌라이가 남경을 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배자는 세수 즉 돈이 많은 곳을 원한다.


쿠빌라이의 선택은 서안이었다. 칸은 하남 땅을 별도로 선물했다. ‘동생은 소문보다 욕심이 적군’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쿠빌라이는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을 덤으로 챙겼다.


남경 지역은 황하의 잦은 범람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땅에 소금기가 많아 농사에 부적합했다. 서안은 비옥했고 오랜 전략 요충지인 관중(關中)을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유비와 조조, 손권이 서로 차지하려던 곳이다.


당장은 남경이었지만 멀리 보면 서안이었다. ‘쿠빌라이 칸’의 저자 모리스 모사비는 이를 두고 ‘탁월한 혜안’이라고 평가했다.


실상은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판단이었다. 쿠빌라이의 엉뚱함은 이후에도 종종 주변을 놀라게 했다. 쿠빌라이는 1259년 여름 군대의 야영지로 한족 군벌 엄충제의 영내를 선택했다. 엄충제는 산동 지역의 맹주였다. 반 몽골 정서가 강한 군벌이었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찾아간 셈이었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엄충제의 세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의 할아버지 칭기즈칸은 어린 시절 타이치우드 족에게 쫓기면서 밤에 몰래 그들의 본거지를 숨어드는 대담함을 보였다.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걸까.


자살행위처럼 보인 쿠빌라이의 여름 야영지 선택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몽골 조정의 권력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워 온 한족 군벌들이 일제히 쿠빌라이 편으로 쏠렸다. 어찌된 일일까?


이런 일은 쿠빌라이의 역사적인 양자강 도강 후에도 일어났다. 운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능력이다. 철저한 계산력과 배짱이 결합된 승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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