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골제국과 양자강
칸의 죽음
중국의 역사에선 남과 북이 싸우면 늘 북쪽이 이겼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패배(敗北)다. 북쪽에게 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에 더 오래 버틴 쪽은 남쪽이었다. 거대한 자연의 방벽 양자강 덕분이었다.
외적이란 주로 유목민 기병대를 말했다. 만리장성을 쉽게 뛰어 넘은 그들의 말은 양자강에 막혀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세계 최강의 몽골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2대 칸의 아들 쿠추는 대규모 남송 원정을 단행한 적 있었다. 조부 칭기즈칸의 군사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대군이었다. 하지만 자연의 위력에 막혀 실패했다. 양자강이라는 거대한 ‘물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양자강의 위세는 몽골군에게 바다나 다름없었다.
강을 건너더라도 단단한 성벽과 깊은 해자가 버티고 있었다. 날씨와 모기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작은 모기는 거대한 기마대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녔다. 전설의 기마부대는 전투가 아닌 질병에 고전하다가 결국 물러서야 했다.
남송의 수도 항주의 당시 인구는 150만여 명. 유럽에서 가장 활발했던 항구도시 베네치아의 인구가 고작 10만 명이던 시절이다. 항주는 풍부한 물산을 지녔지만 주민의 투쟁심은 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보다 금과 비단을 주어 적을 달래는 편을 더 좋아했다. 사치와 향락에 젖은 도시는 심리적 무방비 상태였다.
뭉케는 원정 도중 쿠빌라이를 다시 전장의 중심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본대가 고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몽골의 전통적인 군사 운용 방식은 ‘3군단’ 체제다. 황제 뭉케는 중앙을 맡았다. 서쪽은 명장 수보타이의 아들 우랑카다이. 쿠빌라이에게는 동부전선이 주어졌다.
유능한 군주 뭉케는 잠시도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참모들은 남송의 무더운 날씨에 적응하면서 천천히 진군하자고 요청했다. 뭉케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뭉케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늘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뛰어난 자질을 갖춘 리더가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아랫사람들의 형편을 잘 헤아리지 못해서인 경우가 있다. 뭉케가 그랬다.
6월 들면서 장마에 폭풍우까지 겹쳤다. 뭉케가 서두른 반면 쿠빌라이는 서서히 나아갔다. 느리지만 단단했다. 남쪽에서 성공을 거둔 우랑카다이는 동북 방면을 치고 올라왔다. 두 군단은 양자강 남쪽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변수가 발생했다. 뭉케의 본진에 전염병이 급습했다. 화살촉보다 더 날카로운 공격력을 지닌 질병이었다. 최강의 몽골기병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바바’라는 이름의 전염병은 콜레라나 이질로 짐작된다. 페스트일 수도 있다. 병원균은 황제의 몸속에도 침입했다. 황제도 예외일 순 없었다. 1259년 8월 11일 뭉케는 잠자리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칸의 자리는 다시 비워졌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정치 사극이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