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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Mar 23.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39)

1. 몽골제국과 양자강

아, 양자강 Ⅱ 


지상 최고의 권력을 놓고 ‘왕좌의 게임’이 벌어졌다. 

무대와 배우, 감독 모두 다큐였다. 정해진 각본은 없었다. 

     

쿠빌라이가 황제 서거 소식을 접한 것은 젖형제 무게로부터다. 쿠빌라이는 무게 어머니의 젖을 함께 먹고 자랐다. 이는 몽골에서 각별한 인연으로 여겨졌다. 마침 무게는 황제의 본진에 속해 있었다. 쿠빌라이에게는 행운이었다. 무게는 급보를 잽싸게 쿠빌라이에게 알려왔다. 


로마 원로원에 의해 내려진 ‘최종 권고’조치가 즉시 카이사르가 주둔해 있던 라벤나로 전해진 상황과 유사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비상조치 내용을 밀사에 의해 미리 알았고, 한발 먼저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유능한 두 전략가는 정보전에도 능했다.  


며칠만 늦게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쿠빌라이의 향후 대응에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그랬듯 쿠빌라이는 권력 중심부에 늘 안테나를 꽂아 두고 있었다. 인편 외에는 별다른 통신 수단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무게는 쿠빌라이에게 즉시 북쪽으로 올라오라고 요청했다. 북쪽이라면 몽골 본토를 의미했다. 황제가 죽었으니 곧 쿠릴타이가 열릴 것이다. 권력을 차지하려면 그 중심에 있어야 했다. 무게의 충고는 당연했다. 


쿠빌라이는 참모들을 모았다. 북행(北行) 의견이 우세했다. 그곳에서 권력의 향방이 결정되니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런데 인척인 바아투르가 뜻밖의 건의를 했다. 바아투르는 쿠빌라이의 손위 동서다. 쿠빌라이의 부인 차비의 언니가 그의 부인이었다.  


바아투르는 양자강을 건너 내려가자는 다소 엉뚱한 주장을 내놓았다. 양자강을 건너자니, 제 정신인가. 나머지 참모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당시 쿠빌라이군은 양자강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양자강은 강이라기보다 온전히 바다로 보였다. 초원에서 자란 몽골군의 대부분은 큰물을 두려워했다. 유목민들은 대지에 익숙했다. 그들은 물의 속성을 낯설어했다. 두려움은 몽골군으로 하여금 물 앞에서 얌전해지게 만들었다. 


강 저편엔 우랑카다이가 몽골군을 이끌고 북상 중이었다. 그들은 습기와 더위에 막혀 고전 중이었다. 그대로 두면 적지에 고립되어 자칫 회복 불능 상태에 빠져들 수 있었다. 

우랑카다이는 명장 수보타이의 아들이다. 몽골에서 수보타이가 갖는 이름은 무거웠다. 그러나 쿠빌라이와는 편치 않은 사이였다. 서로 경쟁의식도 느끼고 있었다. 


원래 쿠빌라이와 우랑카다이는 양자강 건너에서 합류한 다음 남송의 수도 항주를 향해 진군할 예정이었다. 맹장 우랑카다이는 아쉽게도 뭉케의 편에 선 장수다. 대리원정서도 쿠빌라이와 자주 대립했다. 


그가 제거되는 편이 오히려 쿠빌라이에겐 유리했다. 여차하면 자신의 반대편에 서게 될 가능성이 큰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라져준다면 입을 가린 채 표정관리를 하면 그만이었다. 쿠빌라이의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계산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했다. 권력을 차지하려면 북쪽으로 가야한다. 쿠릴타이 현장에 가지 않으면 대권의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렇다고 우랑카다이를 외면하면 아군의 위기를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 정도는 권력을 잡게 되면 저절로 없어질 손실이다. 복잡할수록 단순 셈법을  따라야 한다. 참모들의 의견도 그랬다. 말머리를 북으로 돌려야 한다. 거부하기 힘든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다수가 찬성하는 방향일수록 위험도는 줄어든다. 그러나 상식의 대가는 상식적 결과에 머문다. 때론 상식을 뒤집어야할 때가 있다. 그 때가 지금인가. 쿠빌라이는 몇 번이고 자문해보았다. 

지금이 대권을 향한 고비다. 이번 선택에 자신과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다. 쿠빌라이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쿠빌라이는 1259년 9월 중순 양자강 북쪽 강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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