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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Mar 25.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41)

1. 몽골제국과 양자강

왕좌의 게임 Ⅱ 

    

기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전략가 쿠빌라이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도강의 목적은 위험에 처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장의 군사들에게 이보다 더 큰 감동은 없다.


제 목숨 부지하기도 급급한데 아군을 살리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다니. 도강의 숨겨진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군인들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자 변화가 일어났다. 마치 조부 칭기즈칸의 ‘발주나 맹약’ 이후 불어난 세력처럼 쿠빌라이 주변에 한족 군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족 군벌들의 합류를 신호로 몽골의 다른 부대도 움직였다. 쿠빌라이의 양자강 도강은 유목 DNA에 정주 문명의 골수를 결합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먼저 끌린 쪽은 한족들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몽골족으로 이어지는 도미노 효과를 불러 왔다.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몽골의 동방 3왕가가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했다.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유목민은 오로지 실익을 추구한다. 


그들은 습격을 당하면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들에게 명분이란 생존에 별 소용없는 사치품이었다. 그런데 유목민의 후예 쿠빌라이는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택했다. 그로인해 정주문명에 속한 한족 군벌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들의 지지는 몽골족을 움직이는 또 다른 소득을 가져다주었다.

       

명분을 특히 강조하는 학문은 유학이다. 공자는 명분을 바로하기 위해 정치를 한다고 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만 해도 유학은 대륙의 지배 사상이 아니었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이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유학을 경시했다. 시경과 서경은 유학의 경전이다. 


경전은 성인의 말을 기록해둔 책으로 그 안에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책을 소용없다고 배척하던 한고조 유방이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 혼란기를 거치면서 유방의 태도가 바뀌었다. 술자리서 공신들끼리 칼을 빼들고 싸움을 벌일 만큼 무질서한 모습에 질린 후였다.   


“유학자들이 패권 싸움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일단 다듬어진 질서 유지에는 능합니다. 유학자들에게 조정의 예의범절을 만들게 하여 시행해보면 어떨까요.” 


유방은 유학자 숙손통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한 무제 때 이르자 유학은 국학으로 자리 잡았다. 유학자 동중서는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를 만드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고 주장했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 입맛에 딱 맞는 말이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유학은 잠시 불교와 도가(道家)에 밀려났다. 당이 무너지고 요(遼), 금(金) 등 외세에 나라를 빼앗기자 다시 유학이 주목받았다. 송대(宋代)에 와서는 주자의 신유학이 떠올랐다. 

이를 주자학 또는 성리학(性理學)으로 불렀다. 성리학은 5백 년 내내 조선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오늘 날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그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쿠빌라이의 휘하에는 한족 유학자들이 꽤 많았다. 쿠빌라이는 그들에게서 중원을 지배하려면 명분을 먼저 얻어야 됨을 배웠다. 높은 성벽과 끈적거리는 습기로 둘러싸인 한족들의 제국을 이해하려면 유학을 이해해야 했다.   

  

슬슬 눈치를 살펴오던 남송이 먼저 협상을 제안했다. 쿠빌라이는 “늦었다. 우리는 이미 양자강을 건너왔다”며 일축했다. 하지만 몽골 고원의 정세가 그를 북쪽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쿠빌라이가 강남(江南)에 머무는 사이 대칸의 경쟁자인 아릭 부케는 가만있지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그에게 얌전히 대권을 넘겨줄 수 있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얼마 뒤 우랑카다이 군의 안전 귀환이 확인됐다. 더는 남쪽에 머무를 여유가 없었다. 그 사이 아릭 부케는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변 세력들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동조했다. 죽은 뭉케의 아들들 역시 아릭 부케 편이었다. 그는 열심히 수도 인근 군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아직 병력의 수에선 쿠빌라이가 앞섰다. 그러나 군사적 정황 외에는 대부분 쿠빌라이가 불리했다. 아릭 부케는 수도를 차지했고, 지지 세력들을 주변에 거느리고 있었다.  


아릭 부케가 군대의 일부를 쿠빌라이의 중심 거점인 개평으로 이동시켰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린 것이다. 장기판의 상대편 말(馬) 하나가 우군 진영으로 한 발 전진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남쪽에 지체하다간 발밑의 땅이 사라질 판이었다. 쿠빌라이는 북상을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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