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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Mar 27.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 (43)

1. 몽골제국과 양자강

회회포(回回砲) 


남송의 황제가 바뀌었다. 도종(度宗)이 죽고 공제(恭帝)가 즉위했다.     

 

황제의 나이 고작 네 살이었다. 실권은 재상 가사도가 틀어쥐었다. 모든 조정이 가사도의 뜻대로 움직였다. 실력자에게 어리고 나약한 왕만큼 바람직한 조건은 없었다. 


남송 조정은 뿌리 채 흔들리고 있었다. 사바나에서 약한 상대는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힘을 잃은 남송은 몽골에겐 좋은 사냥감이었다.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남송 정복의 대업을 수행할 적기가 찾아왔다. 


조부 칭기즈칸이 마지막으로 남긴 숙제였다. 더 이상 물의 장애와 높은 성벽, 끈적거리는 날씨와 작은 곤충(모기) 탓만 할 순 없었다. 더구나 쿠빌라이에겐 양자강을 한 번 건너본 경험이 있었다. 


남송의 부(富)는 진작부터 유목민들을 유혹해왔다. 쿠빌라이는 남송 정복을 위한 다국적 군단을 꾸렸다. 사령관 가운데 유정과 사천택은 중국인, 아릭 카야는 위구르인, 아주는 몽골족이었다. 포병사령관 이스마일은 멀리 중동에서 왔다. 21세기 초 이라크 전쟁에 가서야 이 정도 다국적 군단을 볼 수 있다. 쿠빌라이의 몽골군은 신 개념 군대였다. 


상대도 전쟁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사도는 수군제독 여문환을 양양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어리석은 자의 훌륭한 선택이었다. 여문환은 모든 면에서 불리한 전투를 5년이나 버텨냈다. 몽골군을 상대로 이토록 오래 전쟁을 벌인 군대는 고려와 여문환 뿐이다. 쿠빌라이는 나중에 그를 수군 제독으로 중용했다. 적이지만 버리기엔 아까운 장수였다. 


양양은 남송의 수도 항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끼고 남으로는 현산(峴山)을 둘렀다. 삼국지연의는 이곳 일대를 차지하기 위한 위, 오, 촉이 치열한 다툼을 세밀히 기록하고 있다. 촉의 명장 관우가 전사한 곳도 이 지역이었다. 

가사도는 어린 황제에게 늘 승전 소식만 전해주었다. 물론 허위 보고였다. 눈과 귀를 가린 황제는 안심했다. 게 중에는 남송군의 실제 승전도 없진 않았다.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고 여러 차례 양양 성안으로 보급품이 전달됐다. 이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몽골 수군의 전투력이 갈수록 향상됐다. 


양양의 오랜 교착상태를 깨트린 것은 중동에서 건너 온 신무기였다. 회회포(回回砲)라고 불린 투석기는 90㎏ 무게의 돌을 수백m나 날려 보냈다. 거대한 돌은 공포로 변해 성안으로 떨어졌다. 양양의 쌍둥이 도시인 번성이 먼저 함락됐다. 


전쟁에는 막대한 전비가 소요된다. 가사도가 전비 충당을 위해 세금을 올리자 민심은 더욱 그를 외면했다. 여문환의 양양도 얼마 후 항복했다. 여문환은 오랫동안 가사도에게 시달려왔다. 여문환은 외적에겐 높이 평가되었지만 정작 내부에선 시기의 대상이 됐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조정에서 겪은 일이다. 


몽골군은 양주에서 가사도의 본진을 꺾었다. 이 일로 가사도는 실각했다. 그가 패전한 후 항주로 돌아오자 평소 그를 지지하던 자들까지 일제히 탄핵 상소를 올렸다. 권력에 예민한 자들의 특징은 주저 없이 말을 갈아타는 데 있다. 가사도는 유배지로 가던 중 살해됐다. 남송의 마지막 황제는 몽진 길에 바다에서 죽었다.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 


‘보물 창고’ 남송이 쿠빌라이의 수중에 떨어졌다. 양자강 이남의 남중국이 외적에게 정복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회색 늑대와 암사슴의 자손’들은 이로써 세계 정복을 완수했다. 그러나 끝은 아니었다. 더 어려운 과제가 남아있었다. 제국의 경영이라는 낯선 과제였다.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할 순 있어도 다스리긴 불가능했다.   

    

몽골은 고려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애초 고려는 몽골과 직접 접촉이 없었다. 몽골과 금, 거란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변을 겪었다. 금이 몽골을 피해 황하 남부로 밀려나자 만주지역은 힘의 공백상태로 변했다. 거란족은 그 틈을 이용해 여진과 연합하여 요를 재건했다. 몽골이 이를 그냥 둘 리 없었다.


몽골에 쫓긴 거란은 고려의 영토로 넘어왔다. 고려와 거란은 평안도 강동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고려 땅까지 거란을 추격해 온 몽골은 고려와 힘을 합쳐 거란을 물리쳤다. 이를 도움으로 포장한 몽골은 고려 조정에 과도한 대가를 요구했다. 결국 고려와 몽골 두 나라 사이가 벌어졌다. 


몽골사신 저고여가 고려 국경지대에서 피살되자 양측은 전쟁에 돌입했다. 이후 무려 9차례에 걸쳐 40여 년 동안 여·몽전쟁(1231~1273)을 벌였다. 몽골을 상대로 이처럼 여러 차례 그리고 오래 동안 전쟁을 벌인 나라는 고려가 유일했다. 삼별초는 제주도까지 건너가 몽골과 싸웠다.     


‘신라의 경이’라고 불린 문화재도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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