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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Mar 28.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44)

1. 몽골제국과 양자강

가미가제 

  

현존하는 최대의 목탑인 중국의 응현목탑(67m)보다 13ⅿ나 더 높은 황룡사 9층탑이 이 때 소실됐다. 


80m의 목조 건물은 오늘 날의 기술로도 만들기 어렵다고 한다. 이 탑은 공사기간만 92년 걸렸다. 1400년 전 기술로 80ⅿ 높이의 목탑을 만든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쿠빌라이는 ‘왕좌의 게임’을 벌이던 도중 노상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고려의 태자 왕전(王倎)이었다. 왕전은 뭉케 칸을 만나러 가던 중이었다. 뭉케는 이미 죽고 난 후였다. 쿠빌라이는 “고려는 과거 수와 당의 군대를 물리친 나라다. 고려의 왕자가 내게로 온 것은 행운이다”며 왕전을 후히 대접했다.  


왕전은 그곳에서 부왕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었다. 당시 고려 조정의 사정은 왕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정의 중심세력은 왕전을 부담스러워했다. 더구나 태자는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다. 빈자리는 새로운 권력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귀국 길의 왕전에게 보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안전마저 위협받았다. 


권력(power)은 그리스어 가능성(posse)에서 파생됐다. 가능성은 그 안에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권력의 속성은 복잡하고, 심한 변동성을 지녔다. 한자 권(權)은 원래 저울추를 의미한다. 무겁고 가벼움(輕重·경중)을 가름하는 힘이 곧 권력(權力)이다. 


무게를 달아 작물의 가격을 매기는 행위가 권력이었다. 작물을 나누어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저울추의 중심은 오락가락했다. 권력은 또 한 곳에만 머물지 않는다. 변동성은 권력의 속성이다. 불안한 고려 태자 왕전에게 손을 내민 것은 쿠빌라이였다.  


쿠빌라이는 왕전을 도와주었다. 그에게 군대를 딸려 보냈다. 결국 왕전이 왕위에 오르니 바로 고려 25대 왕 원종(재위 1260~1274)이다. 쿠빌라이는 그의 딸을 원종에게 시집보냈다. 혼인으로 고려 왕실의 조정권을 확보한 셈이다. 

쿠빌라이의 딸은 고려에서 제국대장 공주로 불렸다. 원종과 그녀 사이에 태어난 왕자가 충렬왕이다. 이후 6명의 고려 임금이 충(忠)자 돌림을 물려받았다.     

 

몽골의 강펀치를 교묘히 피해간 곳은 유럽과 일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두 지역은 나중에 몽골이 씨를 뿌린 세계화의 가장 큰 수혜자로 드러났다. 반면 이때까지 번성을 누렸던 이슬람 지역은 막대한 데미지를 입었다. 

쿠빌라이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에 조공 사절단을 보냈다. 쇼군(將軍) 호조 도키무네는 몽골의 제안을 거절했다. 쿠빌라이는 당장 일본을 상대로 대규모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한창 남송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은 바다 건너편에 있었다.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나라였다.   


그런 가운데도 몽골은 900척의 배로 전단을 꾸렸다. 고려가 몽골의 일본 원정을 도왔다. 고려·몽골 연합군은 큐슈의 하카다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지상전서 완패를 당했다. 무엇보다 처음 보는 대포의 위력에 혼비백산했다. 몽골군은 그날 밤 바다 위의 배로 돌아갔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태풍이 몰아쳐 막대한 손실을 입고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끝이 아니었다. 쿠빌라이는 1281년 일본정복을 위해 3,500척의 배를 동원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함대였다. 16세기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기껏 130척이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함 수는 210척. 세계최강 해군력을 갖춘 미군은 2021년 현재 6개 함대(2~6함대, 1함대는 없음)에 300여척의 전함을 보유하고 있다. 

항공모함 수는 11대(2017년 건조된 제럴드 포드 함을 포함한 숫자)다. 13세기와 현재를 단순 비교할 순 없다. 배의 크기와 용도도 다르다. 그럼에도 3,500척은 놀라운 숫자다. 


몽골군은 남송을 정복한 후 해군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지만 이번에도 태풍을 만났다. 일본은 신이 바람을 일으켜 자신들을 구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가미가제(神風)다. 


쿠빌라이는 3차 원정을 계획했다. 이번엔 총력전을 구상했다. 그런데 나얀의 반란으로 무산됐다. 두 번은 바람이, 한 번은 반란이 일본을 구했다. 13세기 일본은 작은 국가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일본은 뜻밖의 반사 이익을 얻었다. 비로소 국가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이라는 하나의 국가를 인식하게 됐다. 스기야마 마사아키교수는 “일본에 신국(神國) 사상이 대두된 것은 이 무렵부터다”고 주장한다. 


몽골의 침입이후 유럽에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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