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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Mar 29.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45)

1. 몽골제국과 양자강


  이슬람의 비극 

  

유럽 여러 나라는 이때 민족국가 의식에 눈을 떴다. 유럽은 부국강병을 서둘렀고 네덜란드, 스페인 같은 선두 주자들을 배출했다. 이슬람으로 인해 중국·인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바다 길을 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단숨에 세계 최강 지위에 올랐다. 영국은 유럽 여러 나라보다 200년 늦게 르네상스를 받아들일 만큼 뒤떨어진 나라였다.      


유럽의 이웃 13세기 이슬람 문명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중세 유럽과는 한 참 거리를 두고 앞서 있었다. 아바스(737~961) 왕조 시절 이슬람의 화려함은 극에 달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가 여전히 존재했고, 동방의 당 제국이 전성기를 누렸지만 세상의 중심은 ‘신이 허락한 도시’ 즉 바그다드였다. 서양역사가들은 아바스 왕조를 ‘이슬람의 황금기’로 부른다.


바그다드는 문학작품 ‘아라비안나이트’를 낳았다. 그곳에는 100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목욕탕만 만개에 달했다. 삶은 풍요로웠다. 아바스의 칼리프들은 맘루크로 불리는 노예들을 사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노예들에게 칼을 맡긴 셈이다. 나중에 맘루크들은 주인을 몰아냈다.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진다. 수니파가 다수다. 시아파 중 일부는 이란 북부 천연의 요새에 둥지를 틀고 자객 집단을 만들었다. 부족한 힘은 암살이라는 사나운 수단으로 메웠다. 


아사신의 암살자들은 스스로를 ‘페다이’로 불렀다.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상의 희생은 사후 천국에서 보상받았다. 오늘 날 과격파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의식 구조와 흡사했다.     

 

1253년 훌레구가 이끄는 몽골군이 고원을 떠나갔다. 목적지는 바그다드였다. 2년 전 훌레구는 황제 뭉케로부터 이란 총독에 임명됐다. 뭉케는 동생에게 “아무다리아강에서 이집트 땅의 끝까지 칭기즈칸의 관례와 법을 확립하라. 누구든지 네게 저항하는 자에게는 굴욕을 안겨주어라”고 명령했다. 1256년 새 해 첫날 훌레구는 아무다리아강을 건넜다.  


전투에 앞서 훌레구와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설전부터 벌였다. 훌레구가 먼저 “지상 최고의 힘과 권력을 가진 우리가 너희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 부디 무기를 잡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상대를 자극했다. 


칼리프 무스타심은 “열흘의 성공으로 축배를 들다니. 자신이 모든 세상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젊은이여. 알라의 모든 숭배자들은 모두 내 소유임을 모르는가”라고 답했다. 철없는 쪽은 무스타심으로 드러났다. 바그다드의 약탈은 17일간이나 지속됐다. 부유한 도시였다. 


바그다드에는 몽골군을 반긴 사람들도 있었다. 이슬람의 도시에서 숨죽이고 지내온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몽골군과의 약속에 따라 교회 안에 머물렀다. 교회 문은 단단히 잠겨 졌다. 출애굽의 죽음의 사자처럼 몽골군은 교회를 그냥 지나쳤다. 기독교인들은 신에게 감사했다. 그들은 훌레구의 부인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도(북경)로 수도를 옮겼다. 중국 역사에서 처음 북경이 수도가 됐다. 이후 베이징(北京)은 명․청(明淸)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몽골의 등장으로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렸다.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의 시대인 근대(modern ages)의 단초였다. 유럽은 어떻게 근대의 문을 열었을까. 어떻게 근대를 서양의 시대로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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