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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Mar 31.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47)

1. 몽골제국과 양자강 

팍스 몽골리아 

    

쿠빌라이는 1271년 대원(大元)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선포했다. 원(元) 제국의 탄생이었다. 콜럼버스가 그토록 가기 원했던 나라다. 원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유례없는 대 제국이었다. 


그러나 몸집을 최대한 불린 달(月)은 이내 기울어지게 된다. 쿠빌라이는 1281년 아내를 잃었다. 차비는 쿠빌라이에게 귀중한 정치 참모였다. 마지막까지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이었다. 


차비에 이어 황태자 진금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태평양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닌 황제도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순 없었다. 가족을 잃은 쿠빌라이는 술을 가까이 했다. 


추운 지방에서 살아온 몽골족은 술에 익숙하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들도 술 때문에 일찍 스러졌다. 그런 이유로 쿠빌라이는 술을 멀리해 왔다. 그러나 인간적 상실 앞에서 술을 제외하곤 달리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쿠빌라이는 과도하게 살이 쪘고 통풍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제국은 계속 골칫거리들을 만들어냈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인척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중앙아시아 반란군 시리기는 선왕 뭉케의 아들이다. 쿠빌라이에게는 조카다. 숙적 카이두도 끊임없이 대도(大都․베이징)를 넘보았다. 카이두는 2대 칸 우구데이의 손자다. 그들을 모두 상대하기엔 쿠빌라이는 너무 늙어있었다. 


그의 나이 73세.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오래 산 셈이다. 대도에서 가까운 동방 3왕가 나얀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얀은 칭기즈칸의 배다른 형제의 후손이었다. 동방 3왕가는 쿠빌라이가 아릭 부케와 ‘왕좌의 게임’을 벌였을 당시 그의 편을 들어준 우군이었다. 


쿠빌라이 황실은 손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그의 적자들은 모두 죽고 없었다. 손자들은 아직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맡기기엔 어렸다. 노 황제 쿠빌라이는 직접 전장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쿠빌라이는 선두에서 군사들을 이끌었다. 오랜 전쟁을 통해 터득한 원리다. 지휘관이 뒤에 쳐져 있으면 군사들은 나태해진다. 반대로 지휘관의 등 뒤를 따르는 군사들은 용맹하다. 쿠빌라이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쿠빌라이의 최대 장점 이다. 일단 결심을 하면 빠르게 행동했다.  


나얀은 중앙아시아의 카이두와 연합했다. 아무리 쿠빌라이지만 동과 서 양쪽에 전선을 형성할 순 없었다. 서쪽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그만큼 발이 느려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얀의 오산이었다. 그 조금의 느슨함이 양군의 명암을 갈라놓았다. 쿠빌라이는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였다. 


쿠빌라이의 건강에 대한 정보도 나얀을 방심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통풍으로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코끼리 등에 올라탄 대칸은 요하(遼河)에 위치한 나얀의 본거지를 급습했다. 


전투의 승패는 개전 첫 날 결정됐다. 나얀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로잡혔다. 쿠빌라이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통적인 몽골식 방식에 따라 나얀을 처형했다.  


전쟁을 오래 끌었더라면 카이두가 동쪽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쿠빌라이는 동서 양쪽에서 적을 맞아야 했다.  

반란을 진압한 후 진금의 아들 티무르를 황태자로 간택했다. 쿠빌라이의 뒤를 이은 성종(成宗)이다. 쿠빌라이는 1294년 79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몽골 동북부 켄테이(肯特)산맥 어디엔가 묻혔다. 그의 무덤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 칭기즈칸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쿠빌라이에게는 세조(世祖)라는 존호가 추존됐다. 


원은 어떤 나라였을까. 역사가들은 놀라울 정도의 관용성을 지닌 국가라는 점을 먼저 떠올린다. 외부 인종과 문화 특히 종교에 관대했다. 중국의 희곡, 페르시아의 역사기술, 티베트의 불교 미술은 몽골 치하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원나라에는 연극이 발달했다. 쿠빌라이를 오래 연구한 모리스 모사비에 따르면 이 시대 쓰인 160편의 원곡(元曲)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현대의 법정드라마와 비슷한 내용이 특히 인기였다. 쿠빌라이 조정은 연극의 내용을 트집 잡지 않았다. 반정부적 줄거리가 있어도 슬쩍 눈감아 주었다. 전성기의 원나라는 대영제국과 비견된다. 문화는 융성했고 중상주의를 택해 제국  구석구석에 활기가 넘쳐났다. 


쿠빌라이는 군사와 통상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강력한 초원의 군사력과 남송의 수군을 결합해 육상과 해상의 실크로드를 동시에 장악했다. 쿠빌라이는 유목과 정주 문명을 유합시킨 인물이다. 그는 육로의 역참과 새로운 해상 루트 개척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했다. 세계화에 눈 뜬 최초의 군주였다. 


아쉽게도 쿠빌라이에 관한 서적은 별로 없다. 원(元)이 생성만큼 빠르게 소멸한 탓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중국 역사가들이 이민족의 지배 시대에 관대할 리 없었다. 


레닌은 “역사가의 할 일이란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을 고르는 작업이다”고 말했다. 승자에서 패자로 전락한 원의 역사는 버려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독일이 2차 대전서 승리했더라면, 물론 상상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주인공 대부분은 독일군일 것이다.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한 인간이 개인의 힘으로 세계사로 불리는 인류의 발자취에 던진 파문의 심각함을 고려하면 쿠빌라이만한 존재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은 쿠빌라이의 양자강을 외면했다. 사람들은 큰일을 결정하는 순간 ‘루비콘 강을 건너다’라고 즐겨 표현한다.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은 남았고, 쿠빌라이의 양자강은 버려졌다. 


쿠빌라이는 제왕으로서의 자질 면에서 형인 뭉케만 못했다. 대칸의 지위에 오르기 위한 명분은 동생 아릭 부케보다 약했다. 선왕 뭉케가 죽고 권력 공백 상태였을 때 그는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쿠빌라이는 몽골군에게 바다나 다름없는 양자강이라는 ‘물의 벽’을 뛰어넘어 권력을 쟁취했다. 그는 실익을 포기하고 명분을 선택했다. 이는 유목민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의 대제국은 유목민의 군사력과 정주민의 사고가 결합된 유기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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