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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Apr 01.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48)

1. 몽골제국과 양자강


다양성의 제국 

     

쿠빌라이의 원 제국은 다양성의 나라였다. 유목과 정주의 특성이 함께 녹아 있었다. 그러나 대도(북경)로의 천도는 많은 이탈자를 낳았다. 몽골의 DNA인 유목 문화에 대한 포기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종교적 관용은 일부 세력의 불만을 키우기도 했다. 이 문제는 늘 민감했다. 어느 종교든 열려있음을 표방하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선 관용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끝까지 다양성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자학의 나라 남송을 정복한 후엔 더욱 유학을 장려했다. 변화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서 지배의 동력을 마련했다. 대지주들에겐 토지 소유를 인정했고 집단 농장의 원조인 사(社)를 만들어 농업을 촉진시켰다. 남송은 서서히 대원제국의 일부로 동화되어 갔다. 관용은 군사력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쿠빌라이는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했다. 초원국가 몽골을 해상 물류망을 갖춘 군사대국으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군사와 통상이 하나가 된 나라, 즉 오늘 날의 미국과 같은 나라를 꿈꾸었다. 그 꿈을 이어간 것은 명(明)이 아니라 유럽이었다. 


원은 타 민족이 세운 나라였다. 그 뒤를 이은 명은 철저히 원을 부정했다. 중화주의로 포장지를 바꾸어 외부와의 단절을 자초했다. 유학은 명의 폐쇄성에 한 몫을 했다. 명의 시조 주원 역시 처음엔 유학에 관심이 없었다. 한 고조 유방과 마찬가지로 충과 효를 앞세운 유학이 제국통치에 효과적이라는 점을 알게 된 후 마음을 바꾸었다.  


명의 정화는 1405년부터 7차례나 세계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아프리카 동부 모잠비크까지 항해한 기록도 있다. 정화의 아버지 하지는 메카 성지 순례를 다녀 온 이슬람교도였다. 그러나 1500년 이후 바다에서 중국 전함을 구경하기 힘들어졌다. 


명 조정은 해상 원정 지지파와 북방의 위협에 집중해야 한다는 북방 정책파로 나뉘어 세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북방정책파가 승리하면서 유목세력을 가장 위험한 적으로 선포했다. 이는 곧 바다의 포기를 의미했다.  


16세기 초까지 인도양에선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무역이 이루어졌다. 중국과 아라비아의 상선은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 16세기 이후 사정이 급변했다. 유럽의 함대가 인도양을 장악하면서 바다는 그들만의 것이 됐다. 


몽골인은 유럽에 대포를 제작하는 방법을 전파했다. 화약과 대포는 11세기 동양에서 먼저 발명됐다. 유럽인들은 이를 개량하여 돌 대신 철로 만든 포탄을 개발했다. 대량 살상 무기는 전쟁이 잦은 유럽에서 급속히 발전했다. 


스페인은 1545년 남미의 포토시에서 은광을 발견했다. 단숨에 유럽의 선두주자로 떠올랐다. 그 대가로 300년 동안 800만 명의 원주민들이 그 광산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죽었다. 


18세기 만해도 영국은 인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면직물로 골머리를 앓았다. 19세기가 되자 영국은 면직물 수출국가로 탈바꿈했다. 증기기관 발명 덕분이었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과 인도의 면직물 산업은 역전됐다. 인도는 영국 섬유산업의 원료 생산지로 전락했다. 


1775년 아시아는 전 세계 생산의 약 80%를 감당했다. 인도의 방직 노동자들은 영국 노동자보다 높은 생활수준을 보였다. 1900년 들자 유럽(60%)과 미국(20%) 등 서구는 전 세계 생산력의 80%를 차지했다. 


영국은 18세기 인도의 벵골 지역에 거대한 아편 생산지를 구축했다. 주요 수입 국가는 청나라였다. 1830년부터 영국은 매년 10만 ㎏의 아편을 청나라로 실어 날랐다. 청나라는 전 세계 아편의 95%를 소비했다. 대신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역사학자 칼 트로키는 “만약 아편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대영제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꼬집었다.      


원 제국의 확장은 쿠빌라이의 양자강 도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몽골이 오래 강대국으로 남아 있었더라면 카이사르의 루비콘 강만큼, 혹은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됐을 것이다.  


원 제국(1271~1368)은 채 100년도 지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계사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모든 것의 시작은 몽골고원에서 일으킨 나비의 날개 짓에서 비롯됐다. 작은 바람은 양자강을 건너오면서 태풍으로 커졌다.      

그 태풍은 세계화라는 결과물을 실어 날랐다. 21세기 우리는 그 안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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