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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Apr 03.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 50

2. 이스라엘과 요단강


시오니즘   


오직 여호와를 믿는 야곱의 후예들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      


‘야곱의 사다리’ 곧 천국으로 향하는 관문이다. 야곱의 후손 즉 유대인만 이 사다리를 통해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 구분의 결과는 엄혹했다. 야곱의 후예가 아닌 자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 다른 부족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소유한 가축들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요단강 서편 여리고성의 주민과 그들의 가축까지 모조리 살해했다. 단 하나의 예외도 허락되지 않았다. 극단적 배타성은 수천 년 후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유대민족이 세운 나라다. ‘야곱의 사다리’ 집단 통행증을 가진 민족이다. 다른 민족들은 그런 유대인의 배타성을 무참히 짓밟았다.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마사다 요새 함락 이후 유대민족은 기나긴 디아스포라를 경험했다. 이후 유대인 박해는 2천 년 동안 계속됐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영혼의 고향’ 시온으로 돌아가길 염원했다. 바빌론 강가에 유배됐을 때도 그들은 시온을 향한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디아스포라에서 벗어나길 갈망했다. 박해가 가중될수록 열망은 더해갔다.

1492년 스페인에서 유대인 박해는 절정에 이르렀다. 추방된 한 무리의 유대인들은 옛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숨어들었다. 유럽 어디에도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이후로도 간간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이어졌다. 


유럽이 종교의 극성에서 벗어나자 박해는 줄어들었다. 덩달아 시온주의도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18세기 하스칼라(유대 계몽운동)를 통해 서구 문명에 동화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들은 시오니즘을 포기하는 대가로 평온한 삶을 원했다. ‘야곱의 사다리’는 잠시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19세기 들면서 유럽 내 분위기가 바뀌었다. 동유럽에서부터 유대인 탄압이 강화됐다. 유대인들은 다시 뭉쳐야 했다. 헝가리 태생 유대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시오니스트 회의’를 소집하여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에 우리 땅을 마련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알리야(Aliyah:유대인 이민)로 알려진 대규모 이주가 시작됐다. 1차 알리야는 1881년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유대인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이후 20여 년 동안 자신들의 옛 땅에 수 십 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들이 주로 농사를 지었기에 1차 알리야를 ‘농업 이민’으로 부른다. 유대인들은 땅을 사들였고, 히브리어로 된 신문을 발간했다. 히브리어는 구약성경과 탈무드를 읽기 위해 간직해 온 그들의 언어다. 신약성경은 모두 그리스어로 쓰였다.  


2차 알리야(1904-1914년)에는 4만 명에 이르는 많은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중 절반은 곧 다른 나라로 떠나갔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 가운데 하나인 지중해 야파항 인근에 텔아비브라는 새 유대인 도시를 건설했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다. 1922년에 이르자 팔레스타인 인구의 11%가 유대인들로 채워졌다. 러시아에서 온 유대인 9명은 1909년 9월 최초의 키부츠 데가니아를 세웠다. 


유대인 집단 농장을 의미하는 키부츠는 여전히 200개 넘게 남아 있다. 이곳 주민들은 사유재산을 갖지 않고, 생산 및 분배는 공동으로 이루어진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적절히 섞인 형태다. 의식주는 모두 함께 해결한다. 주거는 부부단위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 18세 이전까지 부모를 떠나 집단생활을 한다.    

  

독일에서 유대인 박해가 일어나자 몰려드는 유대인들의 수가 급증했다. 5차 알리야(1929-1939년)때는 25만 명이 한꺼번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유입됐다. 유대인들이 사들이는 토지의 양이 늘어나면서 아랍인들과의 마찰도 잦아졌다. 


시오니즘은 철저한 고립주의다. 선택 받은 민족 스스로 택한 고립이지만 박해라는 고약한 부작용을 자초했다. 시오니즘은 19세기 후반 처음 등장했지만 그 기원은 수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시오니즘은 싹을 틔웠다. 


요단강은 신국(神國)의 국경이었다. 요단강을 건너 신국에 이르자 유대인들은 집단 할례를 단행했다. 성스러운 시민으로서 자격 인증이었다. 그들은 여리고성의 모든 생명체를 죽임으로써 영예로운 고립주의를 선언했다. 


‘축복의 땅’ 가나안은 풍요로운 땅이 아니다. 비는 애처로울 만큼 적게 내린다. 그들이 떠나온 큰 강(유프라테스나 나일) 유역에 비하면 농사에 적합하지 않는 지역이다. 그런데 왜 굳이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야만 했을까는 의문이다. 오로지 신(神)만이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요단강은 시리아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거쳐 사해에 이른다. 총 길이 250㎞로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이 강이 갖는 의미는 엄중하다. 이 강은 예수가 세례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유대교도들에게나 기독교인 모두에게 신성한 물줄기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출애굽의 요단강과 연결된다.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들이 요단강을 건너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됐다. 고대 이스라엘은 시오니즘이라는 독특한 토양위에 세워졌다. 수 천 년이 흐른 후 두 번째 이스라엘이 같은 땅에 세워졌다. 


옛 이스라엘과 지금의 이스라엘은 다르다. 더 이상 종전의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가 아니다. 이웃 철기문명을 상대로 고작 구석기 무기를 손에 들어야했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2021년 말 기준 1인당 국민 소득 4만 3600달러의 부국을 이루어냈다. 


건국 초만 해도 이스라엘은 원조에 의존해 살던 가난한 나라였다. 반세기만에 그들은 강대국으로 변신했다. ‘야곱의 사다리’는 비로소 그 기능을 시작했다.      


시오니즘의 출발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유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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