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십세기 소년 Jan 31. 2021

#모두의 4차 산업혁명 : 16교시

거대사를 통괄하는 산업혁명 클래스

오늘은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시대 발전상과 관련 규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23. 8년만의 변화         

                                        

 1904년도의 뉴욕 5번가 거리 모습입니다. 마차가 도로를 꽉 메우고 있지요? 당시 주 교통수단은 마차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빨간 원으로 표시한 자동차가 한 대가 보이시나요? 수많은 마차 사이에서 주행하려면 참 애로사항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제 막 등장했음을 알 수 있는 사진입니다. 이 시기에는 뉴욕을 비롯해 필라델피아, 시카고 등의 대도시에 자동차 소유자들의 자동차 클럽이 생겨나던 시기로 1902년 미국자동차협회(AAA : American Automobile Association)가 결성되기도 하죠.


 그러나 대중, 특히 빈민 계층에게는 반감의 대상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심정을 대변하듯 1902년 5월 ‘뉴욕 타임즈’는 자동차를 가리켜 ‘악마의 차’라고 했다지요. 1904년 저 사진이 찍힐 당시 뉴욕시 일부에서는 자동차에 대한 투석이 격렬해 경찰까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답니다. 또 이때에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생산국 타이틀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1907년에 이르러 미국의 자동차 생산 대수는 4만 4,000대에 이르렀다고 하죠. 1910년에는 뉴욕주에서 최초의 운전면허제가 도입되었으며 이후 각 주로 퍼져나갔습니다. 중산층 소비자들은 이른바 ‘자동차 몸살’을 앓게 되죠. 부의 상징인 동시에 시대 트렌드를 반영하는 중요한 액세서리가 된 것입니다.    


 자, 그럼 1912년 5번가 거리를 다시 보겠습니다. 어느새 마차는 이제 보이지 않고 자동차가 가득한 도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건 불과 8년 새에 운송 문화가 바뀌어버린 점입니다. 10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렇게나 급격하게 삶의 방식이, 문화가 바뀔 수 있을까요?


 당시는 포드주의(Fordism)가 대세였습니다. 포드주의라 함은 벨트 컨베이어 시스템이라는 이동형 일관 작업 공정의 도입과 노동자들에게 전문화된 임무를 할당하는 노동 통제로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해 소품종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경영 방식을 말하지요. 1914년에 이르러 완성된 포드주의는 20세기 소비자 혁명의 씨앗이자 견인차가 되었습니다. 2차 산업혁명의 상징 중 하나인 대량생산의 꽃을 피운 것이죠. 1909년 포드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을 보고 큰 충격을 받은 독일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혁명이다. 20세기 노동과 소비문화는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포드의 이런 생산 시스템을 주택 건축에 도입할 수 없을까?”라고 고민했다지요. 그는 시행착오 끝에 1923년 조립식 실험 주택을 만드는데 성공하기도 하였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편리하고, 다루기 쉽고, 가격까지 경쟁력 있다면 하나의 붐처럼 기존의 문화가 대체되는 현상을 우린 여러 차례 경험해 왔습니다. 인도에서 영국으로 들여온 면직물이 상류 귀족층의 문화 트렌드를 뒤바꿔 놓았고, 후추와 향신료가 식생활 문화를 변혁케 했습니다. 이후 TV가 그랬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그랬고, 스마트폰이 그랬습니다. 지금은 인공지능, 블록체인, 헬스케어, 자율주행차 등이 삶의 형태를 또 바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반면 당시 영국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발전과 안정 사이에 후자를 택하게 되었는데요. 영국에서는 적기조례, 흔히 붉은 깃발법(Red Flag Act)이라는 법을 제정했는데 자동차의 등장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마차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었습니다. 1865년 영국에서 제정돼 1896년까지 약 30년간 시행된 세계 최초의 도로교통법인 동시에 시대착오적 규제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합니다. 영국은 마차 사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자동차의 최고속도를 제한하고 마차가 붉은 깃발을 꽂고 달리면 자동차는 그 뒤를 따라가도록 하는 이 법으로 인해 영국은 가장 먼저 자동차 산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미국에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영국의 자동차 브랜드 중에 순간 떠오르는 모델이 있나요? 현장에서 갑자기 물어보면 대답을 머뭇거리는 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웃음)


 사실 그 시기를 조사해보면 그럴만도 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기도 하죠. 초기 증기 자동차의 폭발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무지막지하게 덩치가 큰 증기 자동차가 길을 막는 것은 예사였으며, 시끄럽고 무거워 도로를 자주 망가뜨리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도로 포장 기술이 지금처럼 발전했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비포장 도로에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자동차의 사고가 많았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런 상황에서 사양길을 걷던 마차 업자들이 반기를 들고 정치권에 로비를 해 적기조례를 통과시키게 되죠.


 1861년 영국 의회는 관련법을 시행합니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생긴 문제점을 고치려 만든 도로교통법이 탄생한 것이지요. 적기조례에 따라 증기자동차의 중량은 12톤으로 제한되고, 최고 속도는 시속 10마일(16㎞/h), 시가지에서는 시속 5마일(8㎞/h)로 다니도록 제한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부들이 실직하면 안 되니까, 또 위험하니까 자동차는 마차보다 늦게 운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붉은 기수와 증기 자동차의 모습 / ⓒ sciencephoto.com]


 1865년에는 법을 개정해 제한규정을 더 강화시킵니다. 증기자동차는 시외에서 시속 4마일(6.4㎞/h), 시내에서는 시속 2마일(3.2㎞/h) 이내의 속도로 다니도록 했습니다. 1대의 자동차에는 운전수와 기관원, 기수 등 3명이 타야하고, 그 중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을 들고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자동차의 55m 앞을 달리면서 마차에게 자동차의 접근을 알려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적기조례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하죠. 배보다 배꼽이 큰 경우같은 아이러니라고나 할까요.


 이 법은 무려 30여년이나 시행됐고, 1896년에야 폐지됩니다. 적기조례 시행 직전 영국의 자동차는 시속 40㎞의 속도를 낼 수 있었지만,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했던 영국은 30여 년 만에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프랑스와 독일, 미국, 이탈리아 등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이 때 벌어진 기술 격차를 채우는데 무려 70여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으로 여러 기술 분야에서 세계 상위권을 다투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선도자(First Mover)가 되었을 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 심도있게 고찰해 볼 대목이기도 합니다.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의 4차 산업혁명 : 15교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