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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십세기 소년 Jan 29. 2021

#모두의 4차 산업혁명 : 2교시

거대사를 통괄하는 산업혁명 클래스



두 번째 수업이네요.


반가워요.


#4. 문명의 탄생     

                                        

문명(文明)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즉,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 자연 그대로의 원시적 생활에 상대하여 발전되고 세련된 삶의 양태를 뜻한다."



 강줄기를 따라 비옥한 토지에 정착을 성공한 인류는 언어, 문자와 더불어 농업 경제로 인한 계급 체계가 만들어지며 고대 도시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합니다. 약간의 논란이 있지만 우리가 세계 역사에서 늘 배워왔던 세계 4대 문명이 대표적인 선도 사례죠.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 ⓒ wikimedia commons]


 기원전 3,500년경, 현재의 터키 동부에서 시리아와 이라크를 가로지르는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에서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시작으로 이집트, 인더스, 황하 문명이 차례로 발현하게 됩니다. 물론 학자에 따라 남아프리카나 마야 문명 같은 아메리카 등지의 문명사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또 사실 확인이 필요한 우스갯소리지만 북한에서는 세계 5대 문명으로 대동강 문명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건가요? (웃음)  그러나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은 전체 인류사의 변화입니다.


 이 세계 4대 문명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북반구의 큰 강 유역에서 발생했고, 기후가 온난하여 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었다는 점 외에 도시가 형성되었고, 각자의 문자가 발명되었다는 점입니다. 생산성이 계속 증가하게 되면서 잉여생산물, 즉 사유 재산이 생겨나고 이는 서로 간 필요한 것을 교환하며 일종의 초기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고 초기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죠. 또한 대규모의 수리 사업 등을 관리하고, 감독하기 위한 전제 군주가 출현하였고, 법률이 제정되었지요. 지배자의 권위를 과시하는 사업, 예를 들어 궁전과 무덤 건축 또한 활발했죠. 궁전과 무덤의 크기는 국왕의 권위에 비례합니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뚜렷하게 나뉜 사회에서 지배자들은 피지배층이 자신의 지배에 순순히 복종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게 되었죠.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at)나 이집트의 피라미드(Pyramid) 같은 것이 대표적이겠네요. 이때에는 아마도 신과 더 밀접한 생활상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기에 지배 계층은 대부분 대규모 신전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거나 왕의 무덤을 만들어 내세에 대한 공고한 믿음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더스 문명에서 탄생한 브라만교가 그리했고, 이집트의 파라오와 피라미드, 미이라 관습이 그 시대상을 잘 보여줍니다.

지병석

 한편 문명은 특정한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지구 각 지역의 요지에 자리 잡은 고대 도시는 주변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변화해 왔을 것입니다. 지역마다의 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토착 종교가 있음에도 불교, 이슬람, 기독교 3대 종교가 다른 지역에도 골고루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합니다.


 인류는 도시 체계를 갖추며 전과 다른 생산 체계를 만들어 내기 시작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이뤄지면서 저마다의 삶의 양태도 바뀌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인더스 문명이 발현한 하라파, 모헨조다로 등지에서는 급수, 하수, 쓰레기 처리시설, 공중  목욕탕 등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하수 처리시설은 중세시대까지도 유럽 등지에서 발전하지 못했던 공중보건 개념이라고 합니다. 이를 무려 기원전 2,500년경에 만들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앞서 농업 혁명의 이면을 살펴본 바와 같이 생산물의 차지는 공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온한 삶을 위해서는 더 많은 땅과 노동력, 또 생산물의 끊임없는 확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안전하게 지킬 필요도 있었을 것입니다. 문명 간 정복과 수탈의 역사가 이후로 오래도록 반복된 연유입니다. 또한 문명의 혜택을 한껏 누리고 있는 지배층의 호화로운 생활의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행해졌죠. 이들은 거대한 소유 토지 경작에 수많은 노예를 혹사시켰으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백성으로부터 막대한 조세와 공물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지배층은 더 많은 노예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관리들은 정복지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징수한 것이지요. 지배층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을 처벌하기 위해 법률을 만들어 놓았으며, 저항할 경우 곧바로 군대를 파견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연스럽게 문명은 고도화를 거듭했을 것이고 이는 점차 적은 노동을 들여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과학 기술이 도구의 진화와 새로운 자원을 에너지로 변환하며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기계를 만들어내고, 또 그 기계의 자동화를 실현시키고, 이제는 인간의 지적 능력까지 넘어서고 있는 산업혁명 시리즈가 탄생하게 된 하나의 단초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5. 산업혁명 전초전                           

                  

 산업혁명을 본격적으로 다루기전에 반드시 주목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이건 다른 수업이나 책, 사료에서 잘 다루지 않고 있는 부분인데요. 바로 인쇄혁명과 대항해시대예요. 이 두 가지 역사의 맥락을 짚어보지 않고서는 산업혁명의 배경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먼저 인쇄혁명부터 봅시다. 활자 인쇄와 전파는 비로소 지식의 대중 전파를 가져온 아주 중요한 일이었지요. 마치 단일 서버에 저장된 데이터가 클라우드 서버로 이동해 언제 어디서나 소실의 위험 없이 동일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된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당시의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가 1448년경 활판 인쇄술로 ‘불가타 성서(Vulgata : 구텐베르크 성서)’를 대량 인쇄하여, 성직자와 지식인들만 읽을 수 있었던 성서를 대중화시켰기 때문이지요.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라틴어 불가타 성경 /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

  

 당시 성서를 비롯한 책들은 필사본이라 수량이 적어서 가격이 매우 비싸고 구하기가 힘들었지만, 활판 인쇄술이 서양에 등장하면서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이전보다 쉽게 지식의 보고인 책과 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대량 생산된 책 중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작품도 있었는데  이것은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었다고도 해요. 이 외에 활판 인쇄술은 대중 매체의 한 종류로서의 현재의 신문이 탄생하는 데에 기여를 하기도 했답니다. 지식과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던 대중이 책을 통해 똑똑해지고, 또 그 지식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기술 역시 기록되고 발전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이른바 ‘근대’의 형성에 핵심적 기여를 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다른 국가보다 일찍 혁명(17세기 명예혁명)을 거치고, 봉건제가 해체되어 정치적인 성숙과 안정이 이루어지면서 이전보다 자유로운 농민층이 나타났는데 이는 인쇄 혁명으로 말미암은 지식의 보급과 의식의 성숙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합니다.


 독일의 마인츠(Mainz)라는 소도시에 제가 직접 다녀왔는데요, 바로 마인츠가 구텐베르크의 출생지이기도 하고, 구텐베르크 박물관(Gutenberg Museum)이 있기 때문이었어요. 박물관은 아담한 규모의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시대 혁명의 소스가 고스란히 들어차 있었지요. 내부를 돌아보다보면 진정한 산업혁명을 의미하듯 ‘Industrial Revolution’이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대하고 묵직해 보이는 활판 인쇄기들이 죽 늘어서있는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마인츠, 구텐베르크 박물관에서]

  

 당시 우리에게도 금속활자가 있었지요. 무려 70여년 앞선 1377년 고려시대에 말이죠.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체요절’이 그것입니다. 명실상부한 전 세계가 인정하는 ‘세계 최초’ 타이틀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우리 조상들은 이를 통해 서양처럼 대중화, 근대화에 이르지 못하였지요. 지식의 공급처 및 유통 주체는 국가였고 어떤 책을 찍을지는 왕과 관료들이 결정했기 때문이지요. 결국 체제 유지를 위한 책만 찍어내다 서민의 스마트한 업그레이드는 한참 뒤처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 반론이 있기도 해요. 서양의 알파벳은 26글자에 불과해 당시 한자를 쓰던 우리와 비교해 훨씬 활자 만들기가 용이했고 또 빠르게 인쇄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자는 무려 상용한자만 3,500자가 있다고 하니 효율성 측면에선 ‘그럴만도’ 했겠지요.(웃음)


 두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사건은 이름부터 거창한 대항해 시대라고 알려진 서양 중심의 ‘신항로 개척’ 사건입니다. 사실 애초 서양에서는 대발견의 시대(The Age of Discovery)라고 불렀지만 오롯이 서양인의 관점에 의한 작명일 뿐, ‘역사란 강자, 승리자에 의해 주관적으로 쓰여 진다’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대목입니다. 


 이 복잡다단한 시기, 여러 나라 사정을 이 시간에 모두 다룰 수는 없어 몇 가지 중요한 대목만 소개해 볼께요. 바로 신항로 개척에 따른 새로운 자원과 특산품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예요. 그 중 인도를 통해 들여온 후추와 면,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거둬들인 설탕,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가져온 금과 은 등이 대표적이었습니다. 특히 인도의 오랜 현지 작물인 후추는 맛의 기준을 혁신적으로 바꿔놓기도 했지만 서양인들에게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기도 했지요. 이 보잘 것 없는 향신료로 인해 인도 캘리컷까지 신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을 비롯한 서양은 점차 부유해지게 되었고, 훗날 인도에 면직물과 향신료 등 독점 무역을 바탕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오늘날 마켓캡(Market Cap : 발행주식의 시가총액) 규모를 보여준 동인도 회사(The East India Company)가 들어서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죠. 지면상 더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 항로를 발견하기까지, 에스파냐의 콜롬버스(Columbus)가 인도를 찾기 위해 떠낫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까지의 대항해 시대의 역사적 의미와 해상 경쟁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드라마가 될 테니 꼭 한번 찾아보시기들 바래요. 여전히 지구본을 살펴보면 미국 카리브해 지역에 ‘서인도 제도(West Indies)‘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콜롬버스가 산살바도르 섬에 상륙했을 때 이곳을 인도로 오인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죠. 인도는 유럽의 동쪽에 있는데 말이죠.(웃음) 여전히 지구본에 남아있는 저 지명은 서양 중심사의 웃픈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편 유럽 대륙에서 면직물은 무서운 기세로 수요가 늘어났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은 동물의 털로 만든 모직 의류를 입고 살았더랬죠. 겨울에 따듯할지는 모르겠지만 직물 자체가 무겁고, 통기가 좋지 못했겠죠. 그러나 면으로 된 옷을 입고 나서부터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가볍고, 시원하고, 신축성 있는 면 옷은 가히 혁명적인 시대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또한 상류 계층을 중심으로 유행을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사무엘 페피스(Samuel Pepys)라는 해군 행정관이자 상원 의원은 어느 날 파티에 갔다가 면으로 된 화려한 드레스(최신 신상이겠지요)를 입고 뽐내는 여성들을 보고 모직으로 된 드레스를 입고 있던 자신의 아내와 하녀들을 매우 부끄러워했다는 일기가 전해지기도 해요. 그만큼 가볍고, 감촉이 좋고, 통기성이 좋은 면 옷은 당시의 시대 트렌드였고, 소위 ‘인싸’가 되기에 꼭 필요한 인플루언서의 상징같은 개념이었다는 단편을 잘 보여주고 있죠.(웃음)    


[면직물 유행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무엘 페피스의 모습]

  

 수요가 몰리니 공급자들은 어떻겠어요? 돈도 벌고, 일감이 계속 쌓이겠지요. 인도에서 하도 면화를 가져와 팔아대니 영국에서는 기존 모직업자 보호를 위해 1722년 캘리코 법이라는 면직물 수입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국산품을 애용해야지 우리는 뭘 먹고 살라는 말이냐. 양치기, 농민, 섬유산업 수공업자들을 말려 죽일 셈이냐며 반발하는 기존 상공업자의 보호를 위한 조치였죠. 면직물을 들여온 동인도 회사 직원들도 한 때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소용없었어요. 이 신제품에 대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요를 일일이 맨파워에 의지하는 수공업 형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죠. 그러다 비로소 목화솜으로부터 실을 뽑는 방적기, 천을 엮는 방직기 등 기계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많은 생산, 빠른 생산을 하기 위한 기술 개발을 위해 기술자, 과학자들 간 경쟁이 이루어지고, 거금을 쥔 투자자들이 후원을 하기 시작하면서 비즈니스가 이뤄지기 시작했죠. 또한 당시 영국에서는 기술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최초로 성문화한 특허 제도를 만들어 발명으로 기술 개발한 자에게 독점권을 쥐어주면서 산업 발전을 꾀했습니다. 기술력과 독점을 인정받으려 각국의 기술 인력이 모여든 영국에서는 발명과 혁신이 잇따르고 돈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유럽의 기술 후진국이었던 영국의 처지를 바꿔놓게 되지요. 경제사가 윌리엄 번스타인(William J. Bernstein)은 역저 ‘부의 탄생(The Birth of Plenty)’에서 유럽의 강자 프랑스와 스페인이 근대화에 뒤처진 이유를 특허권 제도의 상대적 낙후성에서 찾기도 하죠. 기술이 발전하여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함으로써 생산의 효율화는 증대되고, 일감이 몰리고 돈이 벌리니 더 많은 인력을 구하게 되고, 더 좋은 기술을 개발하게 되면서 가정이나 공방 중심에서 공장 형태의 생산 기지가 구축되어가며 비로소 산업의 혁명이라는 막이 오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다음 강좌에서 만나요.

#지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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