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생활 중 일본어가 쓰기 싫어진 날
일본에서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
일본어 셧다운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업무와 같이 필수적인 영역을 제외하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모든 일본어를 듣지도 보지도 하지 않으려는 증상이다.
쉽게 말해서 퇴근과 동시에 억지로 일본어를 접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말이냐고? 아니, 그럴 리가.
그냥 임의로 내가 지어본 이름이다.
사실 해외에서 살아가는데, 해외 그 나라말을 안 접할 수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가능한 할 수 있는 일본어를 기피해왔다. 퇴근과 동시에 집에 갈 때까지 무조건 K-POP만 들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 유튜브만 주야장천 틀어두었다.
이렇게 글로 적어보니 굉장히 귀여운 느낌인데 사실 내 상태는 귀엽지 못했다. 그냥, 일본어가 지치는 순간이 오더라고.
하루 24시간 중 3분의 1이라는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다 보니 일본어를 해야만 하는 것에 머리가 어질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여해도 그 회의 내용을 따라갈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도 컸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나의 생각을 오롯하게 언어로 전할 수 없다는 것도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내가 잘하는 것만 하고 싶은 기분.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못났다는 사실을 느끼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
언어로 지쳐버렸으니, 내가 가장 잘하는 언어로 나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렇게 언어적 도피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해외에서 장기로 생활을 좀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하는 내용인 듯했다.
나보다 먼저 일본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인도, 어릴 적 중국에서 장기간 살았던 친구도 내 이야기를 듣더니 그게 무슨 말인지 바로 캐치하더라고. “내가 그냥 요즘 일본어가 듣기 싫어”라는 투정 같은 말에도 “어, 그거 뭔지 알아.”라는 즉답이 올 정도였으니.
나는 이 셧다운 증세가 입사하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 발현했다. 그리고 한 달 넘게 이 증상이 이어졌다.
그러더니 이내 이 증상은 빠르게 부작용을 낳기 시작했다.
언어의 한계가 더 빠르게 체감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는 스스로 피부에 와닿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업무에 지장이 생겨났다.
업무가 하나둘씩 늘어가면서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써야 하는 상황이 늘어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슬랙 하나를 보내는데도 30분은 족히 걸리지. 야근 시간이 점점 느는 것에 비해 업무 달성률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보다 주도적으로 회의에 참여해야 하는 자리가 늘어났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가 말한 내용을 상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고.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나에게 되물어보았다면 좋았으련만, 굳어가는… 속된 말로 썩어가는 표정을 직면한 내 마음이 굉장히 안 좋은 의미로 요동쳤다.)
그리고 결국 나한테 그러더라.
너 사수랑 얘기는 해봤어? 그냥 내가 너 사수랑 얘기할게.
뭔가 머리를 크게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크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냥 멋쩍게 웃으며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모자람을 알았다면 발전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을, 그걸 힘들다는 핑계로 외면해왔던 것이 여기서 터져버린 것이다.
외국인이라는 이유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핑계가 더 이상은 통용되지 않겠구나가 피부로 와닿았다. 머리가 맑아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멈춰 있을 이유가 되어주진 못했다.
일단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 발을 내디뎌 보기로 했다.
그전까지는 일본 미디어를 접하는 일을 일절 금해 왔는데, 넷플릭스에 있는 일본 미디어에 손을 뻗어 보는 중이다. 일본 미디어를 일본어 자막으로 보는 요즘이다. 그걸 어떻게 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한자를 사용하고 있고 말하고 있는 문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발버둥이랄까.
그리고 전화 일본어도 결제해두었다.
지독하게 회화체에만 익숙하다든가, 쓰는 단어만 반복해서 문장 자체가 단조롭다든가, 표현하고 싶은 적확한 단어를 찾지 못하든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양한 주제로 일본어를 사용할 환경을 늘려보면 어떨까, 하는 그런 시험적인 마음에서 선택하게 되었다.
또 좋은 방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며 하나씩 시도해 보려고.
연말연시 휴가의 마지막 날을 코앞에 앞두고 있는 지금, 사실 머리가 많이 아프다.
또다시 내가 못남을 보여줘야 하는 구렁텅이에 제발로 들어가야 하는 사실이, 두통을 불러일으키고 메스꺼움을 유발하고 있다. (얼마 전, 최근에 야근을 하는데 야근 2시간째가 되자 시야가 점점 뿌예지더라. 그러더니 헛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모니터를 보는 것에 역함이 느껴졌다. 더 이상 외국어가 머리에 들어오는 것을 몸이 거부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사실 아직도 왜 일본어를 잘해야 하는 걸까. 이 회사에서 무얼 얻을 수 있을까, 그건 정말이지 모르겠다.
회사는 그냥 다니는 거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떠한 목표를 갖고 싶다. 이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나라에 있어야만 하는 어떤 핑계라도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