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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포터 Apr 08. 2021

낡은 종이는 미련 혹은 추억을 싣고

 얼마 전, 방을 정리하다가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어딘가 낯익지만 기억나지 않던 그 종이는 사 등분으로 접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펼쳐본 종이 안에는 미래 계획을 다짐하고자 2018년 12월부터 2019년 입사 전까지 적어 두었던 나의 계획표가 있었다.


 참 신기했던 것은 종이의 상태가 꽤 온전했다는 점이다. 노트 속지를 북 찢어 생긴 울퉁불퉁한 부분도 그대로였고, 종이 안쪽과 바깥쪽은 어떤 오염도 되지 않았다. (물론 싸구려 노트였기에 햇수로 2년이 지난 만큼 종이 색이 바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생각보다 잘 보존되어 훼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일본 회사를 가지 않겠다 선언한 이후로, 그 회사와 관련된 크고 자잘한 모든 것을 곧바로 버렸을 터였는데 이 종이는 아직 방 한 켠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회사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두던 파일이 아닌 대학교 4학년 시절 항상 들고 다니던 노트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전에 세웠던 이 계획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절박했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재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을까.




 종이에 적힌 글을 찬찬히 읽어보기로 했다. 크게 세 가지가 적혀 있었다. 


1. 회사에 필요한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자

2. 서비스 기획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미리 하자

3. IT에 대한 지식을 쌓자


 이 세 가지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이직이라는 굳건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합리화를 참 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일본 취업이 만족스럽지 않았을 때도 비교적 그 상황에 순응하려고 했다. 그때 내게 크게 다가왔던 해결책이 바로 이직이었다.


 이직이 나의 판로를 바꿀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비스 기획자를 꿈꿨고 (파견이라고는 하나 결과적으로) 꿈꾸던 IT업계에 들어오기는 했다. 전혀 다른 업계에서 이직을 시도하는 것보다 비슷한 계열이라면 이직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했다. (물론 직무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었지만, 그 속에서 엮을 거리는 분명히 존재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종이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네가 바로 문・이과 통합 인재야, 혜리야.”


 안타깝게도 나는 이 문구를 실현하지 못했다. 내가 이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행한 모든 것들이 단편적으로 끝나고야 말았다. 버둥대며 이것저것 손은 대보았으나 그 결과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이른바 “실패”했다. (애초에 일본에 가지를 못 하였으니 “이직”이라는 목표를 영영 이룰 수 없게 된 것도 있다.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은데 -입사 예정자인 상황인데- 어떻게 이직을 시도한다는 말인가.)


 개발 공부를 하며 내가 개발에 적합한 인간이 아님을 알았다. 알고리즘을 설계하는 것이 생각보다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발에 쉽게 정이 붙지 않았다. 서비스 기획 수업을 찾아 직무 이해도를 높이고자 했다. 서비스 기획 수업을 듣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내 손으로 산출물을 직접 만드는 것은 별개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보처리기사도 필기는 안정적으로 합격했지만, 실시는 다른 문제였다. 한 번 떨어지고 재시험을 봐야 하는 실정이다.


 어쭙잖고 미진한 나의 노력은 이상과 현실에 금을 내어, 괴리를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해본 것은 단 하나도 없으면서 괜히 두려움만 더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일본 취업에 실패했고 취업을 기록하기 위한 노력도 그다지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낡은 그 종이를 버릴 수 없었다. 종이에 적힌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다가 책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책장에 살짝 꽂아두었다.


 이것은 미련인지, 추억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종이가 필사적이었던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약간은 애틋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한 그날의 나를.


 여기에 기록하고 행했던 모든 노력이, 애석하게도 실패로 끝난 모든 것들이 결코 헛되지는 않길 지금의 내가 조금은 힘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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