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고기로 만든 고급 스테이크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롤리타> 속에는 어떠한 도덕적 교훈도 없다."
논란과 찬사 속에 빛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그 파격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문학적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문학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면 성 관련 묘사가 으레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그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역겨운 주제로 만든 가장 예술적인 소설"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다. 소아성애라는 주제로 이런 책을 쓰다니, 만약 나보코프가 요리사였다면 썩은 고기로도 고급 스테이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상술했듯 이 책에는 어떠한 교훈도 담고 있지 않는다. 즉 작가는 주인공의 행위가 정당하지 않음을 전재로 깔고 있었고, 주인공의 행적으로는 어떤 교훈적 의미를 주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진짜 교훈이 단 하나도 없는 그저 그런 포르노그래피였으면 그냥 삼류 소설로 묻히거나 당국의 검열을 받았을 것인데 어떻게 살아남아 명작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작중 등장인물은 여러 명이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험버트와 롤리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풀어진다. 이 책의 시선 또한 험버트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험버트는 소녀와의 사랑을 예술로 정의하며 님프니 뭐니 하는 개념을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그러고는 롤리타를 포함한 여러 소녀에게 욕망을 품는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롤리타의 내용이다
우선 극찬 한 번만 하겠다. 이 책은 치명적일 정도로 중독성이 있다. 문학적 표현이 너무 아름다워서 책이 술술 읽힌다. 러시아 소설 특유의 딱딱한 문체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철저히 금기된 것에 대한 호기심인지, 작가가 놓은 언어의 덫에 걸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책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금기된 사랑에 중독된 험버트와 그것을 다룬 책에 중독된 필자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다는 점을 알고 약간 섬뜩함을 느꼈다.
어디서 이런 예술적인 중독성이 나온 걸까. 필자는 책을 다 읽고 덮고서야 알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험버트의 시선으로만 본 것이다. 책을 읽으며 역겨운 소아성애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포장한 험버트의(넒게 보면 작가의) 낚싯줄에 걸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방 한쪽에 있는 언론 기사조차도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펜은 칼을 이긴다는 말이 있다. 맞다 펜은 어떠한 무기보다 강력하다. 너무나도 강력해서 사회적으로 절대 금기라고 합의한 행위조차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다.
책을 덮고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작가는 롤리타를 통해 소아성애를 미화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미화를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시종일관 험버트의 시선으로 서술되다가 마지막에 롤리타의 시선을 잠시 보여주며 험버트는 "멋지고 예술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의붓딸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는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단순히 서술자의 시선을 바꾸는 것으로도 이런 반전을 만들었다, 만약 작가가 정말 소아성애를 미화하려 했다면 마지막 부분에서 반전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아동 성범죄뿐만이 아닌 모든 유형의 범죄에서 범죄자는 자신이 옮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역사적으로 많은 범죄자들은 법정에서 자기 변론을 했지만, 결국 큰 비난을 받고 처벌을 받는(롤리타도 감옥에서 쓴 책이라는 설정이다) 것을 잘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을 가지고 작가는 의미를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험버트가 작중 단 한 번이라도 롤리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회규범의 기본이라 볼 수 있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행동 보기"를 험버트는 끝내 거부했고 끝은 파멸이었다.
험버트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자를 오히려 성적으로 이용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회문제 또한 자신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봐서 생기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대부분의 현대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얻으려 하고 시선은 더욱 편협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만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이에 반하는 사람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또한 자신의 틀림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시선만이 옮다고 주장하는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나보코프는 교훈을 쓰지 않았다. 맞다, 우리는 적어도 "타인의 시선에서 보기" 같은 당연한 행위를 교훈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나보코프는 "타인의 시선에서 보는 것도 못하는 험버트 같은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문학적 교훈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한편 나보노프가 놓은 언어의 덫을 겨우 빠져나온 후, 펜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필자는 이 책이 소설임을 인지하고 소아성애는 절대 옹호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책을 읽었지만 험버트의 행동에 잠시나마 공감했다. 험버트의 시선으로만 책을 쓰니 험버트의 행동에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우리 주변의 언론이나 정치인들의 연설도 대부분 자신에게 유리한 시선으로 대중에게 알린다. 우리가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기보다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능력도 갖추어야 함도 소소하게 일깨워준 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