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30대에 갈탄사업을 하면서 만난 조르바! 작가는 자신의 생애동안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이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그리고 조르바를 꼽고 있다. 책이나 수도원이나 혹은 구도자의 삶과 같이, 우리가 흔히 보는 배움의 길이라기 보다는, 세상에 놓여지고, 인간과 섞여 살고, 처절하게 삶을 살아왔던 모습, 조르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조르바에게서 마치 책에서 보았던, 구도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던, 그리스도가 가르치던 또는 부처가 말씀하시던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 나는 작가 또한 조르바와 같은 그릇이 되고 있기에, 그를 볼 수 있었고, 그를 느낄 수 있었고, 그를 담아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조르바, 바로 책 속의 저자 '나'와의 사업파트너, 다음의 문장은 조르바가 어떤 인물인지를 간단명료하게 알려주고 있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새롭게 만난다. 끊임없이 놀라고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달고 다닌다. 모든 일이 그에게는 기적이며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새와 돌을 보고도 새삼스레 놀란다." 성경에서도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지 않던가? 세상을 보는 데에 갓 태어난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본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신비롭고 영화롭고 감탄이 멈추지 않을 것이 아닌가? 아무런 저울질도 없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웃을 때면 실컷 울고, 울때면 마음껏 울어버리는 그 어린 아이의 모습...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것이 삶이 아닌가? 무의식 중에 머리로 재고, 가슴으로 기울이고 있고, 수없이 저울질을 하기에 주춤하는 나의 모습..그런 인생을 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또 하나의 즐거움은 경치나 배경을 묘사하는 작가의 디테일, 마치 단어의 조합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듯한 미려한 문장들로 소설 속의 시를 읽는 듯했다. 아마도 많은 여행을 다녔던 작가의 다양한 경험과 그것을 담아내는 섬세함으로 표현했던 유명한 기행문들을 써 냈던 경륜이 묻어져 있어서 그런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이미 몸에 베어진, 삶 속에서 깊이 박힌, 수많은 저울질로 갈팡질팡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나의 모습, 머리와 가슴으로 알고 있는 것이 삶 속에서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 나의 모습, 책을 통해 읽어가며 감동받고 거기서 멈춰있는 나의 모습... 그 벽을 넘어선 조르바, 아예 '갈팡질팡'이란 단어가 그의 삶 속에는 없었다. 그런 조르바를 생각하며, 그렇게 되어가는 작가를 생각하며, 그렇게 되고싶은 나를 생각하며, 책 속의 짧은 감명받은 구절을 남기면서 글을 마친다. 아마도 다시 읽을 때는 지금의 느낌과 확연히 다르겠다는 기대를 갖는다.
지금 우리앞에 필래프가 있으니 필래프만 생각하고, 내일 우리 앞에 갈탄 광산이 있을 때 갈탄을 생각하면 되지요. 어정쩡하면 아무것도 못 해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 했다
책이 아닌 살아 있는 인간들로부터 기쁨을 얻기를 바랬다
내가 죽으면 죽는 거지.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죽는 거요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행복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행복한 순간이 흘러간 뒤에야 그것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늙은 몸속에 그의 몸을 들어서 어둠 속에 유성처럼 날리고 싶어 안달하는 영혼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공자가 말하기를 "많은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 했지. 맞는 말씀일세.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키에 맞는 행복이 있다는 뜻이지.
오늘에서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달았다. 서두르지 말고, 안달 내지도 말고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거기 말뚝처럼 서서 앞뒤로 재고만 있었다.
모든 일을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새롭게 만난다. 끊임없이 놀라고 '왜, 어째서'라는 질문을 달고 다닌다. 모든 일이 그에게는 기적이며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새와 돌을 보고도 새삼스레 놀란다.
당신도 책에 쓰인 것만 믿지 말고 나를 믿으시오!
조르바는 내 안에 움츠린 추상적인 관념들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 숨 쉬는 육체를 선물했어
당신은 책에서 본 거라면 뭐든 다 믿는 구석이 있지만, 한번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을 그는 싸우고 죽이고 입 맞추면서 살과 피로 고스란히 살아 낸 것이었다.
좋은 책은 역시 최소한 두 번은 읽을 가치가 충분히 있다. 세대가 지나면서도 여전히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책들이라면, 그 가치를 가늠해 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소설속의 '나'는 바로 작가 자신을 뜻하며, 그는 2년여에 걸쳐 형이상학적 논리에 사로잡혔던 '부처'에 대한 미완성인 원고를 붙들고 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런 때에 바로 영혼의 몸부림, 즉 삶의 자유, 축복, 완전함 등의 실제모습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조르바'를 만나게 된다. 물론, 작가 자신도 종이에 쓰여진 논리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세계에서 배울것이라는 욕망이 있었기에, '조르바'를 알아보게 되지 않았을까? 작가 자신도 고백하기를 '조르바'는 그에게 삶에 대한 사랑(열정)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을 가르쳤다고 할 만큼, 작가의 삶에 있어서의 빼 놓지 못할 'guru(선생)'였다.
첫번째 읽었을 때는, '조르바'의 삶을 대하는 열정 혹은 자세, 세상을 보는 관점, 죽음을 대하는 자세 등을 보면서, 흔히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책에 쓰여진 논리가 아니라, 몸으로 부딪히며 찢기고 거쳐왔던 그의 "진짜 삶"을 보는 데에 감탄했다. 두번째 읽을 때는 그런 '조르바'를 보면서 소리내어 웃고 있는 나를 봤고, '조르바'의 모습과 '붓다'의 모습 혹은 가르침이 overlap되면서 작가가 가졌던 경외감을 이해해 가는 나를 보게 되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추가로 형광펜으로 칠했던 부분을 따로 읽어가며, 그런 '조르바'의 모습이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모습이 되는 부분과 겹치며 감동받는다고 해야할까? 살아가면서, 저울질을 할 때, 때론 갈팡질팡 할 때, 때론 절망을 받아들일 때... '조르바'를 떠올리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Carpe Diem' 라틴어로의 표기, 영어로는 'Seize the day', 한글로는 '오늘을 즐겨라'가 바로 '조르바' 삶의 핵심은 아닐까? 작품해설 부분에 적힌 이 한마디 문장은, Thick Nhat Hahn 스님의 바로 순간에 대한 Awareness를 뜻하고, 작가 Byran Katie의 설겆이를 하는 그 순간에는 오직 설겆이하는 그 순간을 사랑하는 그녀의 눈이 들어 있었고, 법정스님이나 Henry David Thoreau의 오두막 혼자 살던 모습이 들어 있었으며, Hermann Hesse의 소설 '싯다르타'에 있었고, '조르바'의 행동과 생각에 들어 있었으며, 이는 '붓다'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불교를 종교로 믿지 않는다하더라도, '붓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독자가 읽게되면, 그렇지 않은 독자가 읽는 것보다는 '조르바'의 삶이 보다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혼자 생각해 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