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조지 오웰 산문선>을 읽고...
47년의 짧은 인생! 영국 식민지하에 있던 인도에서의 태생, 똑똑하기에 장학생으로서 기숙학교의 혜택(그러나, 계급 혹은 자본의 격차를 실감한)을 거친 어린 시절, 명문대학으로의 진학을 포기 후, 영국경찰로 식민지배를 하던 버마에서의 근무, 자진 사표, 그리고 영국 어딘가에서의 부랑자로서의 삶, 교사로서의 근무, <동물농장>의 발간 그 후, <1984> 출간, 그러나, 2년 뒤, 폐결핵으로의 생을 마감한 짧은 그의 삶을 들여다 본다. 어쩌면 이 짧은 인생 안에, 세 차례의 전쟁(1차 세계대전, 스페인내전, 2차 세계대전)을 거쳐야만 했던 그가 겪은 시대상이 그만의 작품들을 만든 건 아닐까 혼자 상상의 날개짓을 지어 본다.
이 작품은 조지 오웰이 세상을 떠나고, 남겨졌던 그의 기록의 흔적을 모아, 수필집을 엮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에게 읽히려고 썼다기 보다는, 그가 읽으려던 일기였기도 했고, 남겨놓았던 속삭임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긴장된 클라이막스도 없고, 소설가 특유의 상상 속 극적인 전개도 없지만, 실제의 사건 속에서, 그였기에 관찰하고 꺼내 볼 수 있었던, 그의 생각을 그리고 삶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21개의 짧은 단편들을 모두 작가와 공감할 수는 없었으나, 몇몇 작품 속에서 나의 생각이 그와 만났을 때, 글이라는 장막을 걷고 그의 느낌을 온전히 함께 하며, 외마디 감탄사와 함께 몸 안의 공기가 빠져 나옴을 맛본다.
'온전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글을 쓸 수 있다. 미사여구로 화장을 한 문장보다는 맨 얼굴의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적는다. 그러므로, 지울 수 있는 단어는 지우라.' 이는 조지 오웰이 자신의 글을 쓰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기억한다. 스스로 부랑자의 삶을 살아갔기에, '부랑자 임시 수용소', '가난한 이들은 어떻게 죽는가'를 썼고, 식민지에서의 백인 영국경찰로 근무를 했기에,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같은 글이 남겨졌다. '즐겁고도 즐거웠던 시절'에서는, 학자금을 내지 않고 지냈던 - 학교에서는 가난하지만 공부는 잘하는 아이를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유명한 학교에 입학하게하고, 그 명성을 학교에서 얻을 속셈이 있기에 - 기숙학교에서의 부조리, 불평등, 차별 등의 통로를 헤쳐가야 했던 차별받는 어린 시절의 조지 오웰을 본다. 성장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만의 시각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만일 조지 오웰이 살아 있었더라면, 그의 짧은 글들을 수필집이라고 하며 출간하고 싶었을까? 그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몇몇 에세이는 한 권의 책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당연히 빼고 싶지는 않았을까? 이전에 <동물농장>을 읽었던 나로서는, 조지 오웰이 관찰해 내고, 꼬집어 내는 그만의 시각에 아마도 깊이 매료되었었나보다. 종교라는 검은 망토로 가려놓은 전체주의 지향 교인들, 자본만능주위, 소수권력집중, 그리고 한국의 윤석열 계엄, 극우 선동 등의 갖가지 행태로 흙탕물의 혼돈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늘... 무관심으로 지나쳐 버리지는 말자. 서로가 옳다는 싸움속에서 분통터져 살지는 말자. 누군가를 바꾸려고 발버둥 칠 필요는 없다. 바로 발 밑의 풀 색깔도 바꿀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바로 내가 사는 세상, 내가 보는 관점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책 속에는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도 많다. 그런 문장들을 남기며, 조만간 <1984>도 읽어봐야 하겠다. 조지 오웰, 그의 시선이 좋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폭로하고 싶은 거짓말, 사람들의 주의를끌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나의 가장 최우선적 관심사는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 한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창유리와 같다. 나는 어떤 동기가 가장 강한지 단언할 수 없지만 어느 동기를 따라야 하는지는 안다. 내 작품들을 돌이켜 보면 항상 <정치적> 목적이 없을 때는 생명력없는 글을 썼고 화려한 문단, 의미 없는 문장, 장식적인 형용사에 현혹되어 전체적으로 실없는 글이 되었다.
'다리를 잡아당기다니!' 버마인 치안판사가 갑자기 소리치더니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우리 모두 다시 웃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원주민, 유럽인 할 것 없이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다 같이 술을 마셨다. 죽은 이는 90미터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겉으로는 주연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뒤쪽의 저 노란 얼굴들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떠밀리는 어리석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바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내가 코끼리를 쏘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종종 생각했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등이 다 벗겨진 당나귀는 누구나 불쌍하게 여기지만, 장작을 진 노파는 무슨 사건이라도 있어야 눈에 들어온다.
'내가 담배꽁초를 빚졌잖아요. 어제 당신이 나한테 담배를 줬으니가. 오늘 아침 저기서 나올 때 감독간이 담배꽁초를 돌려줬어요. 도움을 받았으면 갚아야죠. 여기요.' 스코티가 축축하고 더럽고 역겨운 담배꽁초 네 개를 내 손에 올려놓았다.
그러니까 자기 일을 배우려는 열의는 무척 대단하지만 환자가 인간이라는 인식이 없어 보여서 묘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가끔 어린 학생이 자기 차례가 되어 환자를 진찰할 때면, 드디어 비산 기계 장치를 손에 넣은 소년처럼 흥분해서 정말로 덜덜 떨었다.
잠시 후 밖으로 실려 나가 해부실 널빤지에 던져질 이 역겨운 폐기물이 우리가 호칭 기도를 드릴 때 청원하는 <자연사>의 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책 소비량이 지금까지처럼 계속 적다면, 최소한 책을 사거나 빌리는 돈이 너무 비사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보다 투견장이나 영화관, 술집에 가는 것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인정하자.
그 외에 나머지 일은 서평가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찬사를 보내거나 욕을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사기이다. 그는 한 시간에 0.3리터씩 자기 영혼을 하수구에 흘려보내고 있다.
현재의 정치적 혼돈이 언어의 부패와 관련 있으며, 언어 문제부터 바로잡아 나가면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혁명의 순간이 되었을 때 그것을 회피할 사람은 국기를 보고 <절대> 심장이 뛰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개인의 자유란 자신만의 집을 갖고, 여가 시간에 원하는 것을 하고, 위에서 골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즐기는 것을 직접 선택할 자유이다.
중대한 순간에 이 나라의 사기를 꺾은 사람들을 정말로 벌하고 싶다면, 우리가 더욱 쫓을 만한 공범들은 더 가까이 있다. (여기서 공범은 여론을 조장하는 자들)
차이점은 권력이 훨씬 적은 소수에게 집중되고 피지배 민족과 억압받는 계급의 전망이 훨씬 더 어두워진다는 것밖에 없다.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한밤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두 번 다시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나라에서, 간디의 방법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죄란 반드시 우리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일일 때도 있는 것이었다.
성공을 가늠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