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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by 하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책을 덮는다. 밀물처럼 들어오는 죽음에 대한 사색의 여운이 온몸에 퍼진다. 그리고, "인생의 수단으로 삼으며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삶과 죽음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뇌리에 남는다. 길지는 않지만, 마치 이 소설 전체를 담고있는 문장은 아닐까?하며 나를 돌아본다.




'낮'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밤'을 설명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삶'을 살펴보기 위해서 '죽음'을 관찰해 볼 생각은 왜 안했을까? 그/그녀의 것 혹은 당신의 것은 되었지만, 왜 나의 것이라고는 실감하지 않았을까? 두려워서인가? 나에게는 오지 않을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하며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다. 그런 두려움의 해소로, '자신만은 빨리 죽지않고, 편하게 오래 살게, 나중에 죽더라도 나의 천국자리 예약해 주세요'라며 주문(흔히, 기도라고도 한다)을 외는 사람들도 주위에 흔하게 본다. 때마침, 몽테뉴 <수상록>의 '죽음'에 대해 남긴 글을 읽고 있자니, 남겨진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사색의 결정체에 매료되기도 한다. 몽테뉴의 많은 문장들 중에 간략하게 맛보기로 두 문장만 아래와 같이 남긴다.

이 세상이 들어갈 때처럼 나오라. 죽음에서 삶으로 두려움없이 들어갔던 그 길이 삶에서 죽음으로 나오는 길이다.

우리는 언제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떠날 수 있도록 신을 신고 채비해야 한다.




누군가의 부고(訃告)소식을 듣고나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지 머릿 속으로 한번 그려나 보자. 죽은 자가 우선인가, 살아있는 자가 우선인가, 아니면 나의 사회생활이 우선인가? 잠시 눈을 감고 장례식 방문을 기억해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살아있는 자들이 우선이다. 장례식장에서는 어땠을까? 어느새 죽은 자의 이야기보다 살아있는 자들의 이야기가 시끌벅적하다. '아이고, 이제 나는 어떻게 살라고....!' 통곡소리가 죽은 자보다는 살아있는 자기 걱정으로 가득하기도 하다. 이 소설의 앞부분에서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초상집 장면을 경험할 수 있다. 시대, 나라 혹은 인종이 다르더라도 죽고 사는 건 지구상 모든 인간들이 경험할 수 있는 공통된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의 외로움, 다른 이들로부터 나오는 역겨움, 그나마 진실한 동정(同情) - 밀란 쿤데라의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동정'과 '연민'의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다. - 을 주는 게라솜과 아들 바샤를 보면서, 혹여라도 우리가 죽어가는 누군가를 마주하게 된다면, 거짓된 안부로 위안받지 못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줄리어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는 죽는다.' 죽음에 있어서 이반 일리치도 자신은 카이사르도, 일반적인 인간도 아닌 것으로 간주해 왔었다. 자기가 죽을 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도 잠자리를 펴고 침대에 누우면, 아침에 눈을 뜨는 기적의 소중함을 잊은 지 오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하루 동안의 사건사고가 용케 나를 비켜간 행운이 있었음을 잊은 지 오래다. 갑자기 심장이 멈출 수도 있는 건 아닌가? 누군들 알겠는가? 죽음을 생각하니 사는 게 기적이다. 기적이 연달아 생기니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그 일상은 당연해 보였다. 당연한 삶으로 여기다보니, 죽는 건 소설속 이야기인 줄 알았다. 이 땅에서의 마지막 장(Chapter), 어딘가에 조그맣게 적혀있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어 보자. 뚫어지게 보고, 죽음과 함께 살자. 낮과 밤이 하나의 짝꿍인 것처럼, 삶과 죽음도 짝꿍이다. Womb에서 나와서 Tomb으로 가는 것 까지가 이 땅에서의 삶이라면, 다시 Womb이전의 세계로 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인간...우리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끝으로, 생각해 볼만한 문장들을 남기면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잊지 않고 살기를 바란다. 스스로에게 바래본다.

동료인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맨 먼저 한 일은, 머릿속으로 그의 죽음으로 인해 자기 자리가 어떻게 이동하거나 변경될 것인지 계산하고 따져보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그들은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듣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절친했던 동료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보다 죽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함께 느꼈다. 그리고 이반 일리치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고, 친구였다고 자부하는 이 사람들은, 이제 예의상 도의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 추도식에 참석하고, 미망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며 조의를 표명하는 등의 일들이 저도 모르게 귀찮아지는 것이었다.

'이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나한테 일어난 일이 아니야. 나는 이런 일을 겪을 리 없어.'

그녀(아내)의 용건은 바로, 남편이 사망한 경우 어떻게 해야 국가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은 대체로 '삶이란 쉽고, 기분좋고, 고상하게 흘러가야 한다'는 그의 소신대로 흘러갔다.

그렇게 파멸의 끝자락에서 그는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외롭게 견디지 않으면 안되었다.

카이사르는 인간이었고 인간인 그는 죽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나, 이반 일리치에게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지닌 바로 나에게는 죽음이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의 주변 사람들과 그 자신의 이러한 위선이 이반 일리치 생애의 마지막 순간들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서 한다는 일은 사실 모두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난, 내가 조금씩 산을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고 믿었던 거야.

그는 그들 안에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삶의 수단으로 삼았던 모든 것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었으며, 삶도 죽음도 가려버리는 거대하고도 무서운 기만이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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