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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조지 오웰 <1984>를 읽고...

by 하늘

얼마 전, <조지 오웰 산문선>을 읽고 감상문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수필 <나는 왜 쓰는가>에서도 언급했듯이, 작가는 그림같은 아름다운 글보다는 정확한 글을 쓰려고 노력해 왔음을 밝힌다. <동물농장>이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시도했던 첫 번째 책이었다면, 소설 <1984>는 <동물농장>이후 7여년간의 공백기를 보내고, 실패작일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떤 책을 쓰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한 이후의 작품이다. 작가도 자신의 작품들을 보며, 정치적 목적이 없을 때는 글의 생명력을 느낄 수 없었고, 아름다운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에 현혹된 실없는 글이 되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렇게 1948년, 그의 나이 45세,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발표한 <1984>는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소수지배권력의 피지배층에 대한 영원하고 파기불가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배층이 주도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습, 세뇌, 억압 등의 실제적 모습을 보여준다. '가랑비에 옷 젓는다' 하지 않는가? 결국,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비판없이 또는 습관처럼 살아가다가 지배권력의 꼭두각시 부속품으로 자신을 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인생으로 끝날 것임에 대해 경각심을 전달한다. 제발, 그렇게 만들지 말 것을 당부하며 호소하고 싶은 듯 하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영원한 적인 골드스타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환경, 그러므로 허용될 수 있는 각 개인의 감시, 통제, 사상적 학습, 이중사고(doublethink), 처벌, 공포 등을 기반한 빅브라더 통치를 경험한다. 과거의 역사가 어떻게 바뀔 수 있고, 새로운 언어를 왜 만들고, 인간의 기본적 섹스욕구까지도 통제하는 당(권력)의 개인에 대한 감시통제를 볼 수 있다. 2부에서는 그런 통제하에서 생겨나는 '정말일까?'라는 의구심, 현실에서 과거의 사건을 바꾸어 내는 진리부의 당원 '윈스턴 스미스(주인공)'로부터 눈을 떠 가는 미세한 저항의 움직임을 보게 된다. 으레 그래왔던 식으로, 지시가 오면 조작했던 과거에 대해 손톱만큼의 의구심을 갖는 것도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미 지워진 과거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것이었고, 허용되지 않은 줄리아와의 육체적 관계도 체제에 대한 반항이었다. 3부에서는 윈스턴을 체포함으로써,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되었고, 도청되었으며, 계획되었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각종 고문과 폭행, 감금 등으로 자백을 만들어내고, 윈스턴의 밑바닥 정신/사상까지도 개조하려는 당의 지배욕을 드러낸다. 작가는 또한 책안의 책(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전달한 책)의 내용을 담아, 과두정치(Oligarchy)의 모순된 면모를 학술자료처럼 기술함으로써 작가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경각심의 내용을 담는다. 물론, 이는 소설의 내용상, 계획된 저항세력의 시각이었지만...




혹자는 이 소설이 소련의 스탈린주의 또는 공산주의의 독재권력에 대한 비판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조지 오웰도 그의 죽음에 앞서 호소했듯이, 이런 전체주의적 통치를 만들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했던 점을 감안해 보자. 군사독재시절을 거쳐 온 한국의 모습은 어땠을까? 빅브라더의 통치, 텔레스크린을 통한 감시, 세뇌, 감청 등의 모습이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경험한 감시통제의 모습이 1948년에 이미 쓰여진 소설에 나타나 있었다는 것을 보면, 조지 오웰의 깊은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그 때의 군부독재정권이 이 책을 참조하여 빅브라더처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 정도다. 한국의 지난 윤석렬 정부에서의 입틀막, 압수수색, 또는 언론통제 등의 모습을 기억하자. 전쟁은 싸우든 싸우지 않든,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문장 또한 뇌리에 박힌다. 지금도 세계의 어느나라에서는 그들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전쟁의 위협을 이용하고 있지 않는가.




책에 대한 감상문을 두서없이 이어가다보니, 나도 모르게 현실의 정치적 이슈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1948년에 발표된 소설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실제 있던 지배층에 의한 감시, 통제가 존재했던 것, 또는 2025년 현재까지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에 조지 오웰이 우리에게 알려주려 했던 냉철한 지배의 이면을 낱낱이 보여준다 할 수 있다. 끝으로, 읽으면서 표시했던 생각해 볼만한 문구들을 열거하고 글을 마친다.


주위 사람들과 한패가 되어 골드스타인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되자 윈스턴이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던 빅브라더에 대한 혐오감은 숭배로 바뀌었으며...

때로 사람들은 증오의 대상마저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의식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

언제나 그의 눈에 감시를 받고 그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잘 때든 깨어 있을 때든, 일을 할 때든 밥을 먹을 때든, 집 안에 있을 때든 밖에 있을 때든, 목욕을 할 때든 잠을 잘 때든, 빅브라더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 것이라곤 머릿속 얼마 안 되는 공간밖에 없었다.

만일 사람들이 당이 강요하는 거짓말을 믿는다면(그리고 모든 기록이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면) 그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되는 것이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이것이 당의 표어였다.

그들(무산계급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는 것은 과중한 육체노동과 가정과 아이에 대한 걱정, 이웃과의 사소한 다툼, 영화, 축구, 맥주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박이었다. 그들을 통제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몇 명의 사상경찰 정보원이 항상 그들 무리 가운데 섞여 다니면서 유언비어나 퍼뜨리고 위험한 존재가 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을 점찍어 두었다가 없애 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역사책에 쓰여 있는 단어 하나하나, 사람들이 아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들조차 순전히 환상일지도 모른다.

과거는 한 번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바뀔 것이었다.

연속되는 잡무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텔레스크린 앞에서 마음의 동요를 감춰야 한다는 점이었다.

전쟁은 이제 지배 집단이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며, 전쟁의 목적은 영토의 정복이나 방어가 아니라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있다.

과두 정치를 지탱하는 안전한 기반은 오직 집단주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와 권력은 그 둘을 함께 소유할 때 가장 쉽게 방어할 수 있다.

당은 그들의 혈통이 아니라 당 자체를 영구히 존식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 계층적 구조가 언제나 동일하게 유지되는 한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고통을 받으며 바랄 수 있는 단 한가지는 고통이 멈추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없었다. 고통 앞에 영웅은 없었다. 영웅은 있을 수 없다. (고문을 받으며...)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주는 가운데 존재하는 걸세. 그리고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권력자가 선택한 새로운 형태로 다시 뜯어 맞추는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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