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을 읽고...
유명한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지 않은가? 이 작품에 대한 전문가적인 분석도 구글링(googling)만 하면 페이지를 가득 담고 있다. 배우를 양성해 보겠다는 학교든, 학원이든, 아니면 대학 동아리든,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이들이 접해왔던 작품이지 않을까? AI에게 물어보니, 중학생, 고등학생, 성인 버전 등으로 각각 감상문을 뽑아낼 정도이기도 하다. 그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젊었던 나의 시절에는 무엇을 했던 건가? 아마도 학력고사 또는 모의고사 시험의 지문으로 접해 봤던 게 전부는 아니었나? 숙연해 지는 마음을 쓰다듬고, 지금에라도 이렇게 책으로 그리고 영화로 만난 게 어딘가 하며 내심 위로해 주기로 한다.
얼마전에 읽었던 <맥베스>에 이어, 다시 한번 희곡을 손에 쥐었다. 이번엔 <햄릿>으로... 많은 분량은 아니기에, 한가한 틈을 낸 지난 주말동안 읽는 데 무리는 없었다. 발표된 시기를 보니, 1600년이다. 그 당시 덴마크 왕가에서 벌어진 어쩔 수 없던 비극의 맛을 본다. <맥베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한 개인(여기서는 햄릿의 삼촌 클로어디스)의 욕심이 왕을 살인함으로 비극의 도화선에 불을 붙힌다. 이미 언급했듯이, 무수히 많은 자료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니만큼 이야기의 줄거리를 담는 건 무의미하다고 본다. 다만,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많이 들어 친숙하던 문장이 바로 <햄릿>에서 나왔던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들을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 남겨 놓도록 하겠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여러 버젼의 영화나 연극 숏(short)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 맬깁슨이 햄릿을 연기한 1991년에 상영된 영화를 선택하고 소파에 앉는다. 그러나... 모든 대사가 고전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진땀을 흘리며 영어자막을 따라가 본다. 마치, 외국인이 한국의 고전 사극을 보는 느낌이랄까? 어느새, 고전 영어문장을 쫓아가는 것을 뒤로 하고, 배우들의 표정, 감정 또는 행위(특히, 미친 모습으로 노래부르는 오필리어)를 보며 영화에 빠지고 있는 나를 만난다. 책으로 먼저 읽은 후의 시청이라, 비로소 책<햄릿>보다 희곡<햄릿>을 실감한다고나 할까? 다른 때 같았으면, 책의 내용이 영화로 옮겨오면서 그 감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번의 경우는 영화가 오히려 희곡<햄릿>을 맛보는 데 소금 역할을 제대로 해 준 듯 하다.
고전을 읽을 때, 주로 나는 책 속의 등장인물을 사전에 준비하는 편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새로 등장한 인물들을 차곡차곡 추가해 가면서 인물간의 관계를 함께 관찰한다. 그럴 때, 좀 더 명확하게 진행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도움을 받는다. 이번 <햄릿>도 마찬가지였으며, 이 글을 읽는 다른 독자분께도 추천하는 바이다. 끝으로, 놓치고 싶지 않았던 문장들을 짧게 아래에 남기며 글을 마친다. 물론, 1800년대 썼던 영어표현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말이다.
한 눈에는 행복을 담고, 한 눈에는 눈물을 담아 축복으로 장례식을, 슬픔으로 결혼식을 거행하니
친척보단 가깝고 혈육보단 멀지.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Frailty, thy name is woman!)
흉측한 일은 아무리 땅속 깊이 파묻어도 사람의 눈에 드러나는 법.
젊은이는 분별심이 없어 탈이지만 우리 늙은이는 지나치게 걱정해 탈이다.
간결은 지혜의 핵심이며, 장황함은 겉치레에 불과하니
사느냐, 죽느나, 이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 부패한 속세에서는 죄 있는 자가 손에 들린 황금으로 정의를 밀어내고 사악한 이득으로 법을 매수할 수 있지만
들어갈 땐 처녀이나 나올 땐 처녀가 아니라네.
슬픔이 엄습할 때는 하나씩 오는 것이 아니라 떼를 지어 몰려온다오.
저 뼈들을 키우기 위해 들인 수고가 내던져지기 위해서밖에 더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