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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장 폴 사르트르 <구토>를 읽고...

by 하늘

안개 자욱한 도로로 접어든다. 산 속의 안개라 그런지 두껍게 깔려있다. 단 5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어디에 장애물이 있는지, 표지판도 보이지 않는다. 앞차의 비상등을 보면서 따라가려 해보지만, 그것에게는 익숙한 도로였는지, 어느새 나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안개등을 켜도 소용이 없다. 오로지 식은땀을 흘리며 운전대를 쥐고 있을 뿐이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새벽녘에 어느 산을 넘어가던 길이었다. 이것이 바로 처음 <구토>를 읽을 때의 느낌이다. '일기를 쓰는 것이 위험하다', '내가 적은 글이 어느새 진실이 되도록 과장될 수 있다', '존재가 본질보다 우선이다', '나'가 과연 '나'일까? 즉, ego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의 분리, '조약돌을 쥐었을 때 갑자기 구토를 느낀다', 아니 '문고리를 잡을 때 구토를 느낀다' 등등... 무슨 의미가 숨어있는거지? 때론 불교에서 논하는 철학적 사고와 비슷하게 해석되기도 하다. 결코 일반의 문학작품으로 여길 수는 없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 멍한 나의 뇌 속에서 '일시멈춤' 단추를 누른다. 시간의 전개에 따른 일기의 형태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문장은 보여지는 순간의 기록이다. 미사여구도 필요없다. 어느새 읽고 있는 '나'를 작품 속의 '나'로 이입하려 한다. 작품 속의 '나'가 되어 보고자,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한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두꺼운 안개 속 도로를 똑같은 조건으로 다시한번 달려보자. 그렇게 첫 장을 다시 넘긴다. 이런, 제법 형체가 보인다. 무엇이 장애물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표지판도 자세히 보면 읽을 수도 있겠는 걸? 적어도 낭떠러지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번을 읽고 바로 이어, 다시 읽는 <구토>에는 어느덧 형광펜이 가득하고, 문장 들에는 나의 생각이 담긴 메모가 더해지고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보다, 작가 사르트르가 던진 철학적 사고의 결정체를 맛보고, 생각해 본다고 해야 할까?




한글로는 '구토'라고 제목을 지었다. 영어제목으로는 'nausea'이다. 단어 'vomit'과는 뜻이 다르다. 즉, vomit하기 전의 거북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 즉, 더부룩한 또는 뭔가 얹힌듯한 부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그런 관점을 갖고, '나'를 본다. 거울 앞에 서 본다. 이미 어릴 적 나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그럼 어릴 적 나는 어디있는가? 그런데도 어릴 적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나? 뭔가 정의할 수 없는 '구토'상태다. 이번엔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의 하얀구름이 흘러간다. 나의 일생에서 딱 한번 있는 그 순간이다. 다시는 지금의 순간을 가질 수는 없다. 구름을 보고 나는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가? 구름은 그 자체로 존재했는 데, 나는 그것에 의미를 또는 감정을 붙히고 있다.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 있는 데, 거기에 '내'가 끼어들어 정의하고, 이름짓고, 나아가 진실이라고 정의한다. 그럼 그것이 맞는가? 다시 '구토'를 경험한다. 소설 속 '나'인 역사학자 로캉탱이 롤르봉이라는 인물을 연구하여 기록한 들, 그것이 어찌 진실일 수 있겠는가? 또 '구토'를 느낀다. 로캉탱의 연인 '안니'는 이제 기억했던 '안니'가 아니다. 적어도 귓가에 들리는 음악에서는 이 다음에 어떤 무슨 음정이 나올 지 정해 놓긴 했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이 다음에 무엇이 될 지는 모르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 쉽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부조리의 철학은 작가 사르트르와 교류가 활발했던 동시대의 작가 알베르 카뮈의 주된 사상이기도 하였다. 소설 <이방인>에서 보인 뫼르소의 모습에서도 보이지 않는가? '구토'의 모습이...




이제, 나의 <구토>에 대한 감상문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책을 읽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나를 경험한다. 그러나 책을 덮는 즉시, 습관의 밀물이 남긴 자국을 씻어가기도 한다. 장-폴 사르트르의 <구토>, 의미있는 시도였다. 몇몇 주요 문장들을 아래에 남긴다. 소설의 절반까지인데, 너무 많아 여기서 줄이기로 한다.


물체들, 그것들이 사람을 '만지면' 안된다. 살아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용하고 정리하고 그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들은 쓸모 있는 물건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나를 만진다. 그 사실을 참을 수가 없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접촉하는 게 두렵다.

롤르봉의 이야기도 가설일 따름이다.(이것은 자기의 역사연구였음) 이 가설은 내가 세운 것이며, 그 동안 얻은 지식을 종합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롤르봉 쪽에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흙덩어리를 보고 아름답다거나 흉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 얼굴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 게 놀라울 뿐이다.

시간은 서서히 인간에게 다가온다. 시간을 기다리지만 막상 닥쳐오면 사람들은 구토를 느낀다. 시간이 오래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태양, 이 하늘은 거짓에 불과했다. 그것에 속은 것도 벌써 백 번째는 된다. 내 추억은 악마의 지갑에 든 금화 같다. 지갑을 열면 낙엽밖에 없으니 말이다.

요약된 지식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생각해낼 수가 없다. 아무리 과거를 뒤져보아도 이미지의 파편뿐이다. 그 파편이 나타내는 게 뭔지도 잘 모른다. 기억인지 상상인지조차도 모른다. 그 파편들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경우도 많다. 결국 말밖에 남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낡아 버린 것을 느끼고 감각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말이 솟아나는 것을 본다.

현재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 현재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만 허사다. 나는 현재에서 도망갈 수가 없다.

순간순간은 그것을 이어오는 순간을 이끌기 위해서 생겨난다. 나는 매 순간마다 전심전력으로 매달린다. 매 순간은 대치될 수 없는 유일한 것임을 나는 안다.

살아가는 동안엔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환경이 바뀌고 인물이 등장했다가 사라질 뿐이다. 결코 시작이라는 게 없다. 아무런 리듬도 이유도 없는 하루하루가 계속 된다.

나는 존재할 권리가 없었다. 나는 우연히 생겨나서 돌처럼, 풀처럼, 세균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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