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네가 갖고 있는 혜택을 누리고 있지는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위대한 개츠비>의 첫페이지를 펴면, 위의 문장을 처음으로 접한다. 혈연적 신분의 차이가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명시가 되어있지는 않지만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의 인간세상을 보여준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ey into the past."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1920년대 빈농의 자녀로 태어났던 개츠비가 살아왔던 삶, 희망의 녹색불빛을 향한 갈망의 손짓을 이 문장에 담고 있다.
토요일 오전, 어젯 밤 졸음때문에 읽다 중지했던 페이지를 펴고서는, 오랜만에 중간에 끊을 수 없는 작품을 만났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나를 이끌어간다. 물론, 영화 속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샴페인 잔을 들고있는 그의 미소가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기도 하다. 내심 책을 읽은 후에는, 바로 이어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치는 긴장과 재미의 스토리에 빠진다. 많이 낯설지는 않은 뉴욕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가? 이민 1세대로 살아가는 나의 신분적 또는 경제적인 한계를 공감하고 있어서 그런가? 실제로, 작가 피츠제럴드도 뉴욕, 뉴저지를 배경으로 살아왔으며, 가난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거절당하고, 그 상대는 다른 남자와의 약혼, 그 상처를 갖고 1차 세계대전에 소위로 참전, 그리고 전쟁 후의 롱아일랜드에 거주하며 이어졌던 호화로운 생활 등 작품내의 배경이나 이야기에 작가의 삶의 자취가 담겨있다. 역시 작가의 인생은 소설의 뼈대를 구성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
제임스 갯츠(James Gatz),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공에 대한 강한 집념과 갈망을 안고 살던 어린시절의 주인공이다. 제이 개츠비(Jay Gatsby), 17살이었던 그가 댄 코디(Dan Cody)라는 광산 재벌을 조우하면서 바꾼 주인공의 이름이다. 세계 1차대전에 참전한 개츠비, 그리고 그의 꿈의 상징(여기서는, 부(富)를 이룬 사랑의 실현)인 데이지(Daisy)를 만나게 된다. 당시 1차 세계대전 후, 뉴욕의 경제적 부흥을 이루던 시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일확천금의 부(富)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듯한 시대(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 흥청망청한 시대에서의 술에 대한 소비는 불을 보듯 뻔할 터였고, 당시의 금주령(1919-1933)을 이용한 개츠비의 밀주사업은 그를 소위 '졸부'의 대열에 우뚝 세웠다. 그러나, 경제적 부(富)의 성취는 그의 근본적인 열망, 즉 데이지와의 사랑 실현을 위한 과정이었을 뿐, 인간세상에 저변적으로 깔려있는 신분의 한계는 극복해 낼 수 없음을 보이고 있다. 이는 결국, 물질(부:富)도 놓치고 싶지 않고, 상류신분도 놓치고 싶지 않는 데이지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래, 개츠비의 삶은 알겠는데, 그럼 왜 "위대한" 개츠비일까?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이름앞에 붙은 이유는 뭘까? 자칫, '사랑'을 이루기 위한 한 남자가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치고, 한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는 그의 애틋한 열망이 '위대한'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잠시 생각해보면, 데이지집의 녹색 불빛(Green Light)은 개츠비에게 무엇을 뜻할까? 개츠비가 전쟁 속에 있으면서도 놓치지 않고 갈망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개츠비가 제대한 후, 어떻게든 경제적인 부를 이루고 집을 공개하며 파티를 이어갔던 이유는 무엇일까? 개츠비에게 있어서 데이지는 무엇이었을까? '데이지'를 '희망'이라는 추상적 단어로 바꿔보면 어떨까? '희망'을 향한 젊은 청년 '개츠비'의 갈망을 어떻게 볼까? 사회의 통념에 대항하여, 자신의 '희망'을 쫓고자 했던 '개츠비'가 보이는가? 아마도... "위대한(The Great)"이란 수식어는 이럴 때 어울리는 것 같다. 최근 미국에서 외쳐대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great은 개츠비의 GREAT과는 확실히 구별되어야 할 수 있겠다.
끝으로, 이 책을 통해 받은 잊고 싶지 않은 몇몇 문장들을 아래에 남기면서, 나의 짧은 소감을 마치고자 한다.
대도시의 현란한 어둠 속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고 사람들도 쓸쓸해 보였다.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을 낭비하고 있는 젊은이들, 혼자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며 레스토랑 쇼윈도우앞을 서성이는 직장인들, 그들에게서 나는 떨쳐 버리기 힘든 인생의 고독을 느꼈다.
결국 꾸미는 태도는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한 가면이기 때문이다.
개츠비가 그 집을 산 건, 데이지네 집이 바로 만(Bay) 건너편에 있기 때문이에요.
바로 그것이었다.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데이지의 목소리는 돈으로 충만했다. 데이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높낮이의 매력은 바로 돈이었다.
개츠비는 부유함 속에서 젊음과 돈이 유지된다는 것, 데이지의 화려한 옷가지, 은빛으로 빛나는 신선한 생동감이 가난한 이들의 처절한 삶과는 무관하게 평화로운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톰의 외모와 지위는 데이지의 마음에 꼭 들었다. 그의 됨됨이나 사회적 위치의 무게감에 데이지는 우쭐해졌다. 물론 데이지가 어느 정도 갈등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약간의 안도감을 찾은 것은 분명했다.
"그 인간들은 썩어빠진 속물이에요." 나는 잔디밭 너머로 소리쳤다. "당신이 그 인간들을 합친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누구나 마지막 순간에는 인간적인 관심을 받을만한 권리가 있기 마련인데, 불행하게도 게츠비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데이지와 톰은 정말 무책임한 사람들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망가뜨려 놓고는 엄청난 돈이나 철저한 무관심 속으로 사라지면 그뿐이었다. 그러고는 자기들이 만든 지저분한 잔해들을 다른 사람이 치우도록 하는 그런 족속들이었다.
개츠비는 해가 갈수록 멀어지는 그 초록 불빛의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그때의 초록색 불빛은 우리를 피해갔지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내일이 되면 우리는 더 빨리 뛸 것이고, 그럴수록 두 팔은 더 멀리 뻗어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화창한 날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