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째날 12/31

혼자의 여행은 끝나고, 가족의 여행이 시작되다.

by 하늘

여행 길에 오른 지, 꽤 시간이 지났다. 2025년의 마지막 날, 시애틀에서 눈을 뜬다. 밤새도록 안개가 점령한 도시의 어느 한 숙소에서 눈을 뜨니 온 몸이 찌뿌둥하다. 문을 여니, 뿌연 안개의 세상이다. 한 숨을 들이쉬니, 바로 콧 속 가득 축축함이 전해 온다. 겨울의 살을 애는 듯한 차가운 대기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잔디는 이슬을 맺고 선명한 초록색을 드러낸다. 나뭇잎 하나 없는 가지에는 조그만 이슬의 새순들을 맺고 있다. 아들에게 물어보니, 시애틀에서 자주 접하는 날씨란다. 아침녘, 흐리고 습한 대기를 뚫고 트램(Tram)에 오른다.




주변을 둘러보며 SeaTac 공항 로비를 걷는다. Seattle과 Tacoma라는 지역이름을 합쳐서 만들어 낸 SeaTac, Bellevue와 Redmond를 합친 BellRed라는 식의 병합한 고유명사가 꽤 실용적이다. 아내와 딸아이가 곧 도착할 공항로비에서 읽고 있던 책 '스토너'를 다시 편다. 일주일이나 지났을까? 읽었던 마지막 문장을 다시보며, 이전의 기억을 더듬는다. 기억 속을 헤치며 이야깃 속으로 빨려들어 스토너가 가까이 오는 순간, 이내 아내와 딸아이의 음성이 들린다. 신기한 듯, 공항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비행기속에서 겪은 불편함과 번잡함을 연신 뱉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책을 덮는다. 이제, 혼자보다는 같이 다니는 여행이 시작된다.




내일이면 캐나다 벤쿠버로 넘어가는 일정인지라, 이 곳 시애틀의 반 나절동안은 짦고 굵은 일정이다. 이미 내가 거친 곳들을 단 몇 시간만에 훑고 간다. 연신 사진찍기에 특히나 바쁜 두 사람은 흔히 보는 여행객의 모습이다. 그리고 추가되는 건, SNS로 검색된 Tea가게! 그 곳은 꼭 들러야 한단다. 40여분의 waiting time에도 불구하고 주문을 넣어 놓고(물론 App으로...), 빌딩 숲을 걸어가며, 사진찍고, 어딘가 아는 것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신기해 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주문한 Tea가 나올 시간을 셈하고 있다. 저녁의 먹거리는 워싱턴 대학 주변 음식점들 중의 순두부 집으로 간단다. 이 또한 인터넷 Review로 검색해 놓고, 별이 몇 개인지를 따라간다. 간판은 순두부 집인데, 메뉴판을 깨알글씨로 가득 메운 온갖 종류의 한식과 분식, 조그만 주방에서 수 십여개의 메뉴를 만들어 낸다. '어! 느낌이 이상한데?' 게다가, 'Review를 달면, 밀키스가 공짜!' 안내문이 테이블마다 붙어 있다. 주위를 보니, 음식카트 위에 가득 쌓인 밀키스가 보인다. '이런, 낚시에 걸렸군!' 하는 속마음을 가진 채, 아이들에게는 티를 내지 못하고, 기쁜 마음인 척, 주문을 한다. 한국음식이름을 영어로 번역된 것들을 읽어가며 말이다. "Spicy Grilled Chicken and sweet sauce with cheese", 이건 추가요리로 주문해 본다. 그러고 보니, 4명이 5개의 서로 다른 음식을 주문하고 있다. 어쨌든 입맛에 익숙한 듯한 한국식이면 괜찮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입맛은 바꿀 수가 없구나!




5시가 지나면 어둑해 지고, 6시가 채 되기도 전에 암흑의 밤이 시작된다. 시계를 보면 6시도 안되었는데, 느낌은 벌써 밤 8~9시다. 또다시 밤 안개가 거리 전체를 가득 채우는 거리를 걸으며 -짙은 안개로 가시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다-, 귀를 덮는 털모자를 눌러 쓰고, 어느덧 이 지역의 기후에 제법 적응해 간다. 한기(寒氣)가 느껴지는 날씨에도 디저트로는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한다. 꽤 긴 하루이기도, 또 많이 걸어 피곤한 하루이기도 하다. 지친 몸을 따뜻한 물로 적셔내고, 곧장 침대에 뻗어 버린다. 몇 초가 지났을까? 의식의 흐름을 금방 잃는다. 그리곤, 다음 날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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