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을 읽고...

by 하늘

짧은 소설이다. 아니, 소설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 사실적이다. 그렇다고 다자이 오사무의 100% 고백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인간 실격>을 읽는 내내, 그의 깊은 시선을 느낀다. 그의 말없음을 본다. 그의 숨결을 느끼고, 그의 그림자를 곁에 두기도 한다. 이 작품을 발표한 해가 1948년이고, 5번째의 자살 시도만에 그의 생(生)을 던진 때도 같은 해이다. 그의 나이 39살! 때문에 <인간 실격>은 그의 생애 마지막 완결 작품이 되기도 하다.




그렇게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었나요?

이 곳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 버티기에 그렇게 많이 힘겨웠나요?

주인공 요조에게 당신의 흔적을 남기셨군요.

한 구절 한 구절 속에서 당신의 깊은 한 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 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인간들의 '삶'이라는 것을 두려워하고 매일 밤 잠을 못 이루며 지옥에서 신음하기보다는...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아래와 같이 명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삶을 '자살'로 마무리하기 보다는, 그 삶이 어차피 부조리한 상태로 있으니, 받아들여 반항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이 될 것을 강조한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카뮈가 태어난 해가 1913년인 것을 감안해 보면, 거의 동(同)시대의 두 작가가 가진 '자살'에 대한 시선은 어느정도 비슷했을 지라도, 정반대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을 비교해 보는 것도 꽤 흥미가 있다.




몇 편의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보는 '죽음'을 대하며, 오히려 지금 내가 누리는 '삶'에 광택을 내보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 본인의 죽음, 그것도 자살하고픈 내면은 그다지 경험해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작품에서는 주인공 '요조'의 죽음은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살의 시도에 대해서도 덤덤하고 짧게 그냥 지나쳐 가는 정도이다. 그러나, 실제 그가 자살을 했었기에 그런가, 아니면 그런 시도를 이미 여러 번 해 왔기에 그런건가. 문장 안에 담긴 작가의 고뇌와 우울, 그가 가졌을 법한 죄의식, 허무함 등의 기운이 새벽 호숫가에 깔린 짙은 안개처럼 글 속에 담겨 있다. 그래서 더욱 애절하다. 그래서 더욱 작가의 말없는 모습이 아련하다. 그래서 더욱 여운이 남는다.




작품의 이야기로 잠시 들어가자면, 작가는 처음 세 장의 사진을 보게 된다. 주인공 '요조'의 어린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제법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 든 모습에서 그의 살아왔던 흔적을 엿본다. 그리고, '요조'의 세 편의 수기가 담겨진다. '요조'는 어려서부터 지극히 내성적인 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극히 고립적인 성향을 가지며 자란다. 사람들의 온갖 위선을 경험하고, 자신도 억지 '익살'을 떨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슬아슬 이어간다. 이야기는 그의 내면의 생각을 따라가기도, 또는 그의 살아가는 자취를 따라가며 그가 삶을 대하는 고립적 또는 비관적 시선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첫 번째로 같이 동거했던 '쓰네코'와의 동반자살 기도, 두 번째의 '시즈코'와의 생활에서는 딸과의 행복을 망칠 수 없다고 스스로 떠나게 되고, 세 번째의 '요시코'와의 삶에서는 그녀에게 주었던 신뢰가 더럽혀졌음에 대한 처절한 실망을 보게 된다. 여성들과의 동거외에도 그가 경험한 비합법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활동, 창녀들과의 관계, 알코올 중독, 모르핀 중독 또는 수면제로의 자살 기도, 정신병원 입원 등에 대한 그의 인생의 여정을 따라가기도 한다. 그러면서,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욕구보다는 어찌보면 숨으려는 욕구, 볕이 비추는 곳보다는 오히려 음지가 더 안락하게 느꼈던 삶, 통상적인 일반 삶보다는 오히려 감옥에서가 더 편할 것 같은 '요조'를 보게 된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에서는 요조를 알았었고, 그의 세 편의 수기를 작가에게 보여준 마담은 '요조'에 대해 말을 하며 끝맺고 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자상하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

어찌보면, 요조의 성향이 뭔가 정상적인 것이 틀어져서 그렇게 살아왔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말 순수하고 여린 수정체의 모습을 간직했던 사람이었기에, 일반 사회에서의 삶이 더욱 힘들지 않았는가를 돌이켜보게 한다.




길지 않은 작품이기에, 언제고 한번 다시 읽어보기에도 부담없을 것이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짧은 삶의 흔적을 곁에서 보며, 우리도 살면서 가졌을 법한 비슷한 감정에 이입해 보기도 한다. 인간의 삶, 참으로 오묘하지! 수학의 답처럼 풀어서 답을 낼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모든 사람의 제각각이 걸어 온 발자취가 다르기에, 그렇게 모든 이들의 삶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이 세상에 남겨지는 작품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각자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는 수억만배나 값진 것은 아닐까? 간략하게나마, 몇 문장들을 남기면서 나의 여운을 덮기로 한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그런 수단에 저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도, 어머니한테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 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인간의 삶에는 서로 속이면서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도 입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 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자상하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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